내 일터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다. 국가폭력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국가’ 조사기구. 피해자들을 대하는 일은 늘 조심스럽다. 이들에게 ‘국가’는 여전히 가해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밝히고 명예회복을 돕겠다는 약속에도, 아직도 ‘국가’라는 이름 앞에서 두려움과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당연히 그들을 탓할 수 없다. 긴 세월 국가폭력의 역사를 제대로 ‘기념’하지 못한 우리 탓이다.
<악을 기념하라>(김성환, 보리, 2021년)라는 책의 제목은 내게 채찍 같았다. 나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 이야기가 들어 있을지, 표지를 넘기기도 조심스러웠다. 저자 김성환은 독일 곳곳의 강제 수용소 기념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참혹한 국가폭력의 역사를 확인했다. 그리고 고통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독일이 어떻게 과거를 기념하는지 이야기하며, 그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와 해답을 주는지 찾아냈다.
“라벤스브뤼크의 피에타를 과거 세대, 호수 건너 마을을 현재 세대, 또는 미래 세대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는 큰 호수가 가로막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이곳의 피에타가 늘 마을을 향해 애타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이 책을 쓴 뜻이 바로 거기에 있다.”(477쪽)
조금 편하게 접근하자면, <악을 기념하라>는 한 편의 다크투어리즘 여행기라고 봐도 좋겠다. 하지만 이야기의 수준은 훨씬 깊고 넓다. 나 역시 단순히 ‘어디에 어떤 기념관이 있는지’만 보지는 않았다. 내가 더 궁금했던 건, 그 비극의 공간들을 ‘기념’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책은 기념관의 역사와 가치는 물론, 그곳을 만들기 위해 거쳐야 했던 숙고와 토론과 ‘투쟁’의 시간까지 이야기한다.
“과거를 기억하는 주체는 오늘을 사는 피해자 세대가 아니라 미래 세대라고 생각한다. (…) 미래 세대의 행복 조건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과거와 같은 국가폭력이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가폭력의 현장을 보존하고 그곳에서 지속적인 시민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476쪽)
책을 읽으며, 내가 만난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떠올릴 때가 많았다. 특히 답답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던 때는, 바로 ‘가해자’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다. 긴 세월이 지나도 그들은 여전히 공개되지 않고, 처벌받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다. 저자 역시 책에서, “가해자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 피교육자들이 스스로 판단하는 시대가 오기까지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475쪽)라고 탄식했다.
가해자들이 ‘무사히’ 삶을 누리는 동안, 피해자들은 오히려 자책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국가폭력에 아버지를 잃은 노인들이 “나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내가 못 배운 것이 서럽다.”(KBS뉴스, 정재훈 기자, 2022년 1월 12일)라고 70년 세월을 후회하는 사회라니. 이런 사회를 그저 ‘두고 보는’ 우리 모두가 공범이다.
저자는 남영동대공분실인권기념관추진위원회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남영동은 한국 현대사의 ‘드러난 상처’가 되어야 한다”(194쪽)는 생각으로, “불의한 권력에 대한 시민 사회의 무관심과 용인, 나아가 지지가 있었다면 그러한 우리 사회에 대해 함께 반성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194쪽)고 말한다.
과거사는 ‘과거’사가 아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정의와 인권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속죄 없는 용서’만을, ‘기념 없는 추모’만을 말할 것인가. <악을 기념하라>가 던져준 숙제가 무겁기만 하다.
- 1318을 위한 도서목록 <책꽂이> 202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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