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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나 노, 지나>

긴 글/리뷰

by 최규화21 2021. 12. 2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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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출간된 이란주의 책 <말해요, 찬드라>를 읽었을 때 받은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인간이 아니라 그저 ‘저임금 노동력’으로, 때로는 ‘불법사람’으로 규정된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담은 책. 이게 정말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맞는지, 읽는 내내 눈을 의심해야 했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이란주 작가는 르포작가이자 이주민 인권활동가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이주노동자, 이주민과 연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곁에서 보고 듣고 ‘함께 겪으며’ 그 이야기를 기록해왔다. <말해요, 찬드라> 외에도 <아빠, 제발 잡히지 마> <나의 미누 삼촌> 등 여러 권의 책을 써왔다.

 

<로지나 노, 지나>(우리학교, 2020년)는 이란주 작가가 쓴 ‘르포소설’이다. “가난한 담장 안에 따뜻한 숨을 쉬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버거운 노동을 견디고 있는 이주민 이웃”(채널예스, <이란주 “서로의 삶을 알면, 깊이 이해할 수 있어요”> 2021년 1월 8일)들의 이야기. 부모님을 따라 다섯 살에 한국에 온 방글라데시 소녀 로지나를 주인공으로, 지난 20년 미등록이주민들의 역사를 기록했다.

 

주인공의 이름을 활용한 ‘로지나 노, 지나’라는 제목은 미등록이주민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방글라데시 이름 ‘로지나’는 한국인 친구들에게 ‘노’씨 성을 가진 ‘지나’로 받아들여진다. 동시에 ‘노(No)’라는 말로 한국 사회에서 거부당하고 부유하는 미등록이주민들의 서글픈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노를 잃어버린 작은 배가 하염없이 바다 위를 떠돌듯 우리 가족은 목적지도 희망도 없이 그저 물 위를 떠돌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잔뿌리조차 내리지 않았다. 열두 살, 봄이었다.”(95쪽)

 

이란주 작가는 이번 책에서 ‘르포소설’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책 속 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이다. 책 속 이야기 역시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다. 이 작가는 “독자들이 소설을 통해 이주민의 삶을 접한다면 더 깊게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채널예스, 2021년 1월 8일)라는 기대로 소설이란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로지나 노, 지나>에는 허구의 상상력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사실의 힘’이 있다. 르포만이 가지는 장점이다. 또한 소설적 구성을 통해 재창조된 이야기는 등장인물과 독자 사이를 더 좁히는 데 도움을 준다. 르포와 소설의 장점이 서로를 보완하며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로지나 노, 지나>만의 색다른 매력이다. 

 

이란주 작가가 활동하는 ‘아시아인권문화연대’는 우리 마을에 있다. 작가는 우리 마을에서 로지나와 그 가족들, 이웃들을 만나며 책에 담길 이야기를 취재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 마을에는 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아마도 내가 시장 가는 길에, 학교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퇴근하는 길에 분명히 무수한 ‘로지나들’을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조금 더 특별히 생각하게 된 이유다. 

 

이란주 작가는 “우리 곁에 있는 수많은 사이풀과 메디나, 로지나와 라주, 나라와 뭉크와 수연이를 생각”(279쪽)하며, 책 마지막에 부탁의 글을 남겼다. 낯선 제도와 어려운 조약 이름들이 등장하는 긴 글이 당부하고 있는 것은 결국 ‘존엄’이라는 한마디다. ‘투명인간’도 ‘불법인간’도 아닌 그저 ‘인간’으로서의 존엄.

 

“우리도 세계를 이루는 시민으로서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이주민 또한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며, 이주민의 노고가 더해져 우리 공동체가 이만큼이나마 평안한 것임을, 이주민의 생명과 존엄, 자유와 평등, 안녕과 행복 또한 우리 공동체의 책임임을 알고 힘껏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278~279쪽)

 

- 책방아이 북큐레이터 2021. 11. 10. https://blog.naver.com/ibook2017/22256424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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