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악마의 일기>

긴 글/리뷰

by 최규화21 2021. 12. 26. 16:54

본문

10월, 하면 떠오르는 상징들이 많다. 사랑이 넘치는 ‘어느 멋진 날’로 대표되기도 하고, 그리움 가득한 ‘마지막 밤’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 10월은 조금 다른 의미다. 10월은 내게 ‘위령제의 달’이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가운데 특히 10월에 열리는 행사가 많기 때문이다.

 

까닭 없이 끌려갔다가 흔적 없이 죽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 <악마의 일기>(박건웅, 우리나비, 2020년)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실상을 기록한 그래픽 노블이다. 민간인 학살 연구자 박만순이 쓴 <기억전쟁>(예당기획출판, 2018년)을 원작으로 삼아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박건웅은 한국 근현대사 속 숨겨진 이야기를 끈질기게 다뤄온 작가주의 만화가다. 특히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노근리 이야기>, 4‧3항쟁을 담은 <홍이 이야기>, 김근태가 남영동에서 견뎌낸 22일을 기록한 <짐승의 시간>, 인혁당 사형수 8인의 이야기를 담은 <그해 봄> 등을 통해 국가폭력 문제를 주목해왔다.

 

<악마의 일기>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한 아이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악마의 표식인 ‘666’을 달고 태어난 아이는 몰래 다락방에 숨어 살아야 했다. 아이는 다락방의 창으로 해방과 전쟁을 목격한다.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이웃들이 끌려가던 그날, 아이는 자신의 정체를 깨닫기 시작한다.

 

좌익 전향자들을 보호하고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뜻의 국민보도연맹. 1949년 만들어진 이 단체의 규모는 30만 명까지 이르렀다는 증언이 있다. 말단 행정기관에 의무 가입 인원이 할당되면서, 좌익 활동과 무관하게 강제로 가입된 사람도 많았다. 비료나 배급 등의 혜택을 준다고 유인해 가입시킨 경우도 많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이들을 구금했다. 그리고 학살했다. 법적 절차도 없이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산에서 바다에서 광산에서 굴 속에서 살육이 일어났다. 전국적인 희생자 수는 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20만 명까지 추산된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아닌 다른 민간인 학살 사건을 모두 포함하면 희생자 수는 최대 100만 명까지 추정된다. 온 나라에 유족 아닌 사람이 없었고, 무덤 아닌 땅이 없었다. 수만, 수십만, 숫자로만 표현하면 오히려 무감해지기 쉽다. 하지만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비극성이 비로소 실감 난다.

 

<악마의 일기>는 생존자와 목격자의 구술 증언을 바탕으로 바로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재현해냈다. 그 끔찍함을 확인하다 보니, ‘차라리 이게 다 허구였으면……’ 하는 바람도 생겼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이야기들은 청원 오창창고 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 대전 산내사건 등 실제 사건 속 이야기들이다.

 

화자인 ‘악마’는 학살이 벌어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일기로 기록했다. 책의 끝부분에는 ‘악마’ 아니, ‘악마라는 이름으로 불린 소년’의 진짜 정체가 드러난다. 그 대목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아……” 하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그게 현실이라는 점이 더 슬프고 더 비참했다.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실 진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흘러간 세월 뒤에 숨거나, 비현실적 숫자 앞에 고개 돌린 것은 늘 우리였다. 그날의 진실은 우리에게 70년째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에 어떤 교훈을 남길 것인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진실은 반드시 세상에 드러나고 가해자는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남길 것인지, 아니면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시간만 흐르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길 것인지. 70년째 감지 못한 땅속의 눈들이 오늘 우리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다.

 

- 책방아이 북큐레이터 2021. 10. 20. https://blog.naver.com/ibook2017/222542886256

'긴 글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작된 간첩들>  (0) 2021.12.26
<로지나 노, 지나>  (0) 2021.12.26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0) 2021.12.26
<항일과 친일의 역사 따라 현충원 한 바퀴>  (0) 2021.12.26
<인권을 먹다>  (0) 2021.12.26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