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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먹다>

긴 글/리뷰

by 최규화21 2021. 12. 2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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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먹방’의 홍수다. 텔레비전을 틀면 채널을 가리지 않고 먹방이 나온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음식 이야기를 하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과잉생산 되고 있다. SNS는 말할 것도 없다. 음식도 좋아하고 음식 이야기는 더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공해처럼 흔해진 음식 이야기가 때때로 너무 지겹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색다르다. <인권을 먹다>(변상철, 네잎클로바, 2018년) 어제도 오늘도 우리가 먹은 비빔밥, 감자탕, 순대국밥을 새삼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음식들이지만 숨죽여 듣게 되는 이야기. 음식 이야기, 사람 이야기, 그리고 역사와 인권 이야기까지, 음식이라는 흔해빠진(?)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깊고도 넓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작가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음식을 통해 기억했다. 스물네 편의 글에는 각기 다른 주인공들과 각기 다른 음식들이 등장한다. 평범한 음식들이 어떻게 특별한 사연을 갖게 됐는지, 역시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끔찍한 국가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됐는지,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책을 읽는 내내 피해자들을 향한 존중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 억울한 사람으로만 그려지지 않았다. 고통과 침묵의 시간을 지나, 진실을 찾으려는 그들의 용기와 노력 역시 중요하게 묘사됐다.

 

변상철 작가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202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10년 만에 다시 출범했다. 그곳은 내 직장이기도 하다.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을 찾는 일. 수십 년간 응어리진 슬픔 앞에서 ‘겸손한 목격자’가 되는 것이 내 일이다.

 

하루는 한국전쟁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의 한 유족이 전화를 해왔다. 어머니의 오빠가 희생자였다. 

 

“12년 전에 희생자가 맞다고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는데, 유해 발굴은 아직도 계획이 없나요? 요즘 들어 자꾸 어머니 꿈에 오빠가 나오신다는데……. 어머니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걱정입니다.”

 

86세 어머니를 대신해 전화한 아들 역시 60대의 노년이었다. 하지만 그 사건의 매장 추정지에는 이미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이들에게 얼마나 더 기다리라고 해야 하나. 아니 기다려봤자 별 소용 없을 거라고 말해야 하나. 도저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죄송하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뻔한 대답밖에 하지 못했다. 둘 다 전화를 끊지 못하고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천둥보다 무서운 침묵이었다.   

 

진실을 찾는 일은 이렇게 국가폭력이 남긴 상처를 목격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길게는 70년 동안 침묵해야 했던 고통 앞에서 ‘겸손한 목격자’가 되는 것. 존중을 잃지 않으며 겸손하게 듣는 것에서 치유가 시작된다. <인권을 먹다>에 담긴 스물네 편의 이야기들은 바로 그 ‘겸손한 목격자’가 남긴 화해의 기록이다.

 

“파괴된 자아와 공동체의 이야기는 음식을 먹는 내내 고통과 먹먹함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들과의 식사는 나에게 깊게 각인되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들의 독백이 이제는 세상과 소통이 되길 바란다. 그들이 기억하는 음식을 함께 상상하며 그들의 상처를 함께 만질 수 있는 계기가 되면 더 바랄 것도 없다.”(14쪽)

 

- 책방아이 북큐레이터 2021. 8. 6. https://blog.naver.com/ibook2017/222459237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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