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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간첩들>

긴 글/리뷰

by 최규화21 2021. 12. 2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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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죽었다. 향년 90세. 삶을 누릴 만큼 누리고 편안히 갔다. 단죄도 징벌도 없이, 사과도 반성도 한마디 없이. 그동안 그가 살아 있는 것이 원망스러웠는데, 이렇게 죽어버리니 죽은 것 또한 원망스럽다. 

 

권력에 눈먼 총칼 앞에 시민들은 피 흘렸다. 전두환이 죽자, 언론은 5월 광주의 피해자와 유족들을 찾아갔다. 그들의 원통한 삶을 전두환의 평온한 죽음과 대비시켰다. 광주의 시민들만이 아니다. 전두환의 죽음 앞에서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있을 사람들은 더 있다. 바로 전두환의 손에 의해 ‘간첩’이 된 사람들이다.

 

전두환이 죽었다는 소식에 <조작된 간첩들>(김성수, 드림빅, 2021)을 떠올린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책은 196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일어난 간첩 조작사건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칼럼 가운데 재심에서 무죄로 완결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추려 구성했다.

 

2000년대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한 저자는 국가폭력에 의해 인권을 철저하게 부정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에 가져와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탱크를 앞세운 쿠데타로 권좌를 차지한 전두환. 그는 정당성도 명분도 찾아볼 수 없는 그 얕은 권력의 뿌리를 ‘가공된 공포’를 통해 은폐하려 했다. 그래서 간첩이 필요했다. 간첩이 없다면 만들어야만 했다. <조작된 간첩들>에 소개된 열네 건의 간첩 조작사건 가운데 열 건이 전두환 정권 시절에 일어난 것이다.

 

양심적인 학자, 민주화운동 학생, 재일교포, 납북귀환 어부 등이 그 피해자였다. 이들은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들에게 본보기로 손봐줘야 할 대상이었고, 정권을 공고하게 유지하고 강화하는 소모품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사건인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은 28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1981년 계엄법 위반 등으로 중형을 선고받은 피해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2009년 재심 재판부는 이렇게 밝혔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979년 말부터 정권의 안정을 기할 목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 오늘의 법관들은 오욕의 역사를 되새기며 선배 법관들을 대신해 억울하게 고초를 당하고 힘든 여생을 살아온 피고인들에게 심심한 사과와 위로의 뜻을 밝힌다.”(143~144쪽) 

 

그들이 오명을 벗는 데는 수십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고 그들이 잃어버린 세월과 파괴된 인생이 회복될 수 있을까. 심지어 전두환의 후계자들은 재심과 형사보상 과정에서 2차, 3차의 피해를 주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 ‘한울회사건’으로 2년 반 넘게 옥고를 치렀던 이가 있다. 박재순 박사다. 당시 이 한울회사건의 1심 판사는 이인제였고 대법원 판사는 이회창이었다. 박재순 박사는 김대중 정부 시절 이에 대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2015년 박근혜 정권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그는 다시 이 사건으로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는다.”(76쪽)

 

전두환이 죽었다. 서글프고 비참한 마음이 든다. 그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다. 전두환이 저지른 수많은 국가범죄의 피해자들이 떠올라서다. 더 이상 형식적인 사과의 말조차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문동만 시인의 말처럼 “살아서 징벌한 게 없어서, 오직 지옥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어서” 한없이 원통하다. 

 

단죄와 사과를 기다리던 이들은 삼청교육 피해자들,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들, 의문사 유족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등 수도 없이 많다. 전두환은 삶을 누릴 대로 누리다 평온히 죽었고, 이들은 죽음 같은 고통 속에 살아 있다. 지금 이들의 고통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경청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두 번 다시 ‘전두환의 시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반성과 약속의 행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책방아이 북큐레이터 2021. 12. 14. https://blog.naver.com/ibook2017/222595294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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