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명물인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4월 7일, 봄날 같지 않게 바람은 차가웠지만 황사가 물러난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벚나무가 늘어선 길. 지금은 월미산과 놀이공원 사이에 난 산책로쯤으로 여겨지지만, 매립지 위에 놀이공원이 조성되기 전까지 이 길은 해변을 따라 만든 일주도로였다. 길을 만들고 벚나무를 처음 심은 이들이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늘을 맑았지만 마음은 개운치 못했다.
인천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작은 섬 월미도. 1960년대 진행된 매립사업으로 이제는 섬 아닌 섬이 돼버렸다.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 사람들에게 유람선과 놀이공원으로 대표되는 관광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150여 년 전부터 이어진 커다란 전쟁의 상처는 ‘작은 섬’ 월미도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강변구 작가가 쓴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서해문집, 2017년)는 “작은 섬 월미도가 겪은 큰 전쟁들”에 관한 책이다.
월미공원 입구에서 가까운 해군 제2함대사령부 주둔기념탑에서 강 작가와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인천은 배를 이용해 서울로 가는 관문이었다. 그리고 그 관문으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 월미도다.
그 때문에 월미도의 근현대사는 전쟁으로 얼룩졌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침입한 병인양요, 1871년 미국 함대에 의한 신미양요, 1875년 일본에 의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곳도 월미도였다. 이후 월미도는 일본, 러시아, 미국의 병참기지가 됐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의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유원지로 개발된 월미도에는 해방 후 미군이 주둔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섬이 초토화됐고, 1971년까지 미군이 주둔했다. 미군이 떠난 뒤에는 또 다시 한국 해군이 들어와 2001년까지 머물렀다.
그동안 월미도 사람들은 삶터에서 세 번이나 쫓겨나야 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월미도를 군사기지로 만들며 마을을 강제로 옮겼다. 1942년에는 일제가 선착장을 만든다는 이유로 또 한 번. 그리고 1950년에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마을을 잃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세 번째 사건. 월미도 주민 100여 명의 목숨을 빼앗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실향민 아닌 실향민’으로 만든 그날 말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던 미군에게 최대의 장애물은 바로 월미도에 주둔한 인민군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월미도 무력화. 상륙 5일 전인 9월 10일 아침 7시 폭격기에서 월미도로 떨어진 첫 번째 네이팜탄은 120여 가구 600여 명이 살던 마을 한가운데를 조준했다.
초가집뿐인 마을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뛰쳐나온 주민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마을과 바로 붙어 있던 미군부대로 도망가려 했지만 철조망에 막혔다. 섬을 벗어나는 길은 인천으로 향하는 다리뿐. 혼비백산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미군은 기총소사를 가했다. 폭격기 조종사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낮게 날았다. 사람들은 다리 아래 갯벌로 숨었다. 온몸에 진흙을 묻히고 죽은 체 누워 있었다.
9월 12일까지 세 차례 이어진 폭격. 주민들은 갯벌에 숨어 있다 폭격이 잠시 멈추면 몰래 마을로 돌아가 시신을 수습했다. 불에 타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이 즐비했다.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삶터까지 빼앗긴 주민들은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섬을 떠났다.
이 같은 희생에 대해 강 작가는 “전쟁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이른바 ‘부수적 피해’가 아니에요”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애초부터 마을과 주민들이 공격목표였고,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된 집단학살”이라는 말이다. 1948년부터 마을 옆에 미군부대가 주둔했고, 미군은 마을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군은 어째서 민간인 마을에 집중 폭격을 했을까. 당시 인민군은 월미도의 서쪽 진지에서 서해를 바라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마을의 위치는 월미도 동쪽 해안. 사이에는 월미산이 있었다.
한국 해군 첩보대는 월미도에 ‘인민군 400명이 있다’고 조사했지만, 미군 정보장교는 ‘인민군 1000명이 있다’고 보고했다. 월미도 주민 600명까지 모두 인민군이라고 본 것. 정확한 인민군의 규모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불확실성’을 지워버리기 위해 미군은 마을을 없애버리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월미공원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나 바로 왼쪽에 펼쳐진 공간이 당시 마을 자리다. 인천상륙작전 5일 전 최초의 폭격이 일어난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 섰다. 1997년 만들어진 ‘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가 2007년부터 매년 9월 10일쯤에 ‘월미도 미군 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를 지내는 곳도 이곳이다.
때를 같이해 월미도 한쪽에서는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식’도 성대하게 열린다. 최근에는 영화 ‘인천상륙작전’(2016년)이 흥행한 영향인지, 인천시 중구는 ‘인천상륙작전 월미축제’도 연다. 강 작가는 “폭격한 날 축제는 무슨 축제야, 제삿날인데. 생존자 분들이 충격을 많이 받으셨어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폭격으로 사라진 마을 자리에 검은 벽처럼 서 있는 ‘월미도 연표’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삶터와 고향을 잃고 70여 년째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한 줄도 없었다. 그들은 연표에 담기지 못한 ‘역사의 공백’ 속에서 ‘있지만 없는 사람’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곳은 월미공원 입구 옆에 있는 농성장뿐이다. 2004년 10월 7일 시작한 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의 농성. 올해로 14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 앞으로는 인천으로 가는 길이 뻗어 있다. 폭격 당시 이 길을 건너려던 사람들은 미군 기총소사의 표적이 돼 목숨을 잃었다. 구사일생 다리 아래 갯벌을 통해 인천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미군기지가 월미도를 차지하고 있던 1960년대, 인천시는 월미도 원주민들에게 ‘미군이 물러나면 월미도에 들어가서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미군이 물러나고 1971년 기지 땅을 인계받은 한국 국방부는 ‘소유자가 불분명한 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땅주인을 찾는 대신 국유재산으로 등록해버렸다. 그들을 고향에서 쫓아낸 것은 미군이었지만, 그들의 귀향길을 막은 것은 한국 군대였다.
월미공원에 서 있는 연표의 마지막 줄은 “2001년 월미공원 귀환”이다. 하지만 월미도의 연표는 ‘공원의 귀환’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제 그 연표에,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난 ‘사람들의 귀환’이 추가돼야 한다. 작은 섬 월미도에 남은 큰 상처를 보듬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월미도 주민들의 피해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억압되고 배제된 전쟁의 기억을 온전하게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전쟁을 온전하게, 그 승리와 죽음을 다 같이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는 길입니다.” -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283쪽
- 월간 작은책 201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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