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미군사격장대책본부가 있는 단층 시멘트 건물로 들어갔다. (줄임) 어두운 형광등 불빛 주위로 하루살이들이 빙빙 돌고 있었다. 문 입구에는 불발탄으로 보이는 서너 개의 포탄이 흉물스럽게 내팽개쳐져 있었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포탄이었다.(<매향리 사람들> 17쪽)
용석과 성구가 술잔을 기울이던 곳은 ‘매향리 평화마을 역사관’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매화 향기 나는 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60여 년간 미군 폭격기의 화약 냄새가 자욱하던 마을. ‘역사관’에 가득한 불발탄들은 불과 14년 전만 해도 ‘현재’였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정수리 작가의 소설집 <매향리 사람들>(시와에세이, 2012년)에는 열 편의 단편소설이 묶여 있다. 그 가운데 두 편의 연작소설, ‘매향리 사람들 1-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매향리 사람들 2-잃어버린 고향’이 소설집의 맨 앞을 장식하고 있다. 작가는 직접 발품을 팔아 수없이 매향리를 드나들며 취재했다. “더없이 애정이 가는 작품”(341쪽)임과 동시에 “가장 조심스럽게 쓴 작품”(342쪽)이라고 작가 스스로 소개한 작품이다.
평범한 어촌 마을인 매향리에는 1951년 미군의 ‘쿠니사격장’이 들어섰다. 매향리의 또 다른 이름인 ‘고온리(Ko-onni)’라는 지명을 미국식으로 읽은 것. 지상의 쿠니사격장과 해상의 농섬은 미군 폭격기의 ‘표적’이 됐다. 주민들은 어장과 농경지, 임야 등을 헐값에 징발당했고, 밤낮으로 계속되는 폭격 훈련의 진동과 소음 때문에 집이 무너지고 난청에 시달렸다. 아이를 유산하거나 오폭 사고로 숨지는 일도 있었다.
1988년부터 주민들은 한데 모여 싸우기 시작했다. 2000년은 매향리 투쟁의 정점이 된 해. 사격장 점거 등 시민사회와 대학생들의 전국적인 투쟁으로 농섬을 제외한 육상 사격훈련은 중지됐다. 그리고 2005년에는 농섬까지 반환됐고, 미군 사격장은 완전히 폐쇄됐다. 매향리의 전쟁은 54년 만에 끝났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 1일 낮, 매향리 평화마을을 찾았다. 매향리는 지금 경기만 에코뮤지엄 사업의 중심이다. 경기창작센터는 2016년부터 경기만을 생태와 역사, 예술이 어우러진 에코뮤지엄으로 만들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매향리는 경기도 근현대사 다크투어리즘의 한 축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매향리 사람들 1-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이야기는 매향리가 고향인 세 남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도시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된 뒤 낙향한 용석과, 가족을 등지다시피 도시로 떠났지만 IMF로 직장을 잃은 용석의 형 길수. 그리고 오폭으로 어머니를 잃고 “복수하듯” 미군사격장 폐쇄투쟁에 뛰어든 성구. 어느 날 갑자기 길수가 고향을 찾아오고, ‘이주비’라는 시한폭탄 같은 단어와 함께 그날 밤은 무섭게 흘러간다.
성구는 그날 밤 용석에게 “나도 농섬에 한번 들어갈까 봐.”(19쪽)라고 말한다. 매향리 투쟁의 정점에 있었던 2000년. 내 선배 한 사람도 사격장 점거를 한 적이 있다. 인터넷 속 영상에서, 태극기를 머리 위로 펼쳐 들고 사격장을 뛰어가는 그의 모습을 봤다. 매향리 역사관 앞에서도 그 선배 생각이 제일 많이 났다.
매향리 역사관 앞에는 사람 키만 한 포탄들이 정육점의 고기처럼 매달려 있다. ‘매향리의 시간’이라는 설치미술이다. 몇 걸음 더 걸음을 옮겨보면 크고 작은 포탄들로 만든 더 많은 작품들이 보인다. 길가에도 마치 돌담을 쌓듯 차곡차곡 쌓아놓은 포탄들이 보인다. 지금은 예술품으로 존재하지만 수십 년 전에는 분명 사람의 목숨을 뺏는 ‘무기’로 태어난 것들이다. 녹슨 포탄이지만 섬뜩하고 싸늘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원형 전시관 안에도 포탄으로 만든 예술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매향리 역사관 옥상에 있는 컨테이너와 차량은 폭격 훈련 당시 실제 표적으로 쓰인 것이다. 차량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찌그러져 있다. 컨테이너에는 마치 원래 그물로 만든 것처럼 크고 작은 구멍들이 무수히 많다. 역사관 바깥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포탄 밭 사이에서 피어난 한 송이 평화의 꽃에 물을 주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눈에 오래 담았다.
지난 50년 동안 언론도 정부도 매향리 사람들에겐 언제나 문 밖의 사람이었다. 용석은 바람을 막을 벽도 없는 광활한 광야에서 맨몸으로 싸웠던 게 후회되었다. 이제 남양만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광기만 남았다. (줄임) 태극기보다 성조기보다 더 높이 펄럭이는 붉은 깃발을 향해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손에 든 쇠붙이에서 조명탄의 퍼런빛이 소리 없이 감돌았다.(30~31쪽)
매향리 역사관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매향교회가 나온다. 1952년 세워진 매향교회는 매향리의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 미군의 오폭으로 지붕이 파손돼 새 예배당이 건립된 뒤로는 빈 공간으로 방치돼왔다. 경기문화재단 경기창작센터는 이곳을 ‘매향리 스튜디오’로 조성해 2016년 개관했다.
매향교회 옆으로 난 마을길에서는 ‘매향리 사람들 2-잃어버린 고향’의 허 노인과 아들 천호를 떠올렸다. 폭격 때문에 아내가 아이를 유산했다고 믿은 젊은 날의 허 노인은 결국 도시로 떠나 이이를 얻었다. 하지만 도시의 고된 삶에 지친 허 노인은 매향리로 돌아왔고, 천호는 자라 다시 아버지가 될 나이가 됐다. 허 노인은 천호가 도시에서 아이를 낳고 살기를 바라지만 “허 노인과 아들의 생각은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46쪽).
마을길에서 옛 사격장을 땅을 바라본다. 하늘 위로 쭉쭉 솟아 있는 조명탑이 보인다. 2017년 개장한 국내 최대의 유소년 야구장 ‘화성드림파크’다. 그 옆으로는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공사가 한창이다. 2020년 준공을 목표로, 해안들판에는 습지원, 조류섭식지, 패치필드(경관작물재배지), 해안사구원 등이 들어서고, 평화정원엔 쿠니 메모리얼 가든, 파노라믹 전망대, 메모리얼 기념관, 안내소 등이 자리 잡는다고 한다.
‘매향리 사람들 2-잃어버린 고향’의 결말은 열려 있다. 지금 매향리의 현실도 ‘평화’의 미래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매향리에는 또 다시 ‘전투기’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매향리 역사관 바깥벽에 걸린 새로운 현수막. “평화와 공동번영의 시대 전투기 비행장 필요없다 군공항 특별법 개정 철회시키고 화성 이전 막아내자!”
2017년 2월 국방부는 수원 전투 비행장의 단독 예비 이전 후보지로 화성시 우정읍 화옹지구를 선정했다. 54년간 전투기의 폭격을 겪은 매향리와 바로 닿은 곳이다. 매향리라는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그들에게 인내심을 요구하고 있다. 너무 오랜 인내는 미움으로 바뀔 텐데 말이다.(341쪽, 작가의 말)
- 월간 작은책 201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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