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이름은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그때의 폭력이 지금까지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을 망쳐놨다는 겁니다.”
선감나루터에 선 김영배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의 몸이 떨렸다. 11월 23일 늦가을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기 오면 원래 몸이 떨려”라는 그의 말이 농담 같지가 않았다. 각지에서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아동 들은 이곳 선감나루터를 통해 섬에 들어온다. 이들을 기다리는 곳은 ‘선감학원’이었다.
선감학원은 1942년 지금의 경기 안산시 선감동에 세워진 소년 강제수용소다. ‘부랑아’로 낙인 찍힌 아동들은 강제수용과 폭력, 강제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교육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이름 없는 존재로 지워져갔다. 해방 후 경기도에 이관된 선감학원은 1982년까지 일제강점기와 똑같은 방법으로 운영됐다.
“국가는 가난을 없애기보다, 가난한 아이들을 감춰서 없애버렸습니다. 국가는 할당제로 이른바 ‘부랑아’ 단속을 지시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아이들이 강제로 끌려왔습니다.”(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대표)
당시 선감나루터에 내린 아이들이 겁에 질린 채 걸었을 길을 따라 걸었다. 선감학원 부지에 자리한 경기창작 센터까지는 약 1.5킬로미터. 산길을 오르자 지금도 일부 남아 있는 당시 건물들이 보인다.
아동들은 농사일과 염전 일 등 가혹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김 회장은 ‘축산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소도 20두 이상 키우고 많이 키웠지. 나는 쇠고기 한번 먹은 기억이 없는데, 일은 우리가 다 한 거야.”
기숙사 건물도 일부 남아 있다. 기숙사 이름을 세심사, 단심사, 각심사 등으로 지었다. 마음을 씻고 바로잡고 깨달아서 새 사람이 되라는 좋은(?) 의미였지만, 그곳에서 벌어진 것은 잔인한 폭력이었다.
“아이고 여기서 죽어라고 맞았어……. (기숙사가) 차고 넘치도록 애들을 계속 잡아들였지.”(김영배)
경기도기록관이 보관 중인 퇴원아 대장에는 4,700여 명이 기록돼 있다. 그보다 1,000명 이상 더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중에는 살아서 선감도를 나가지 못하고 억울하게 눈을 감은 아이들도 많다. 맞아 죽고, 병에 걸려 죽고, 섬을 탈출하려다 바다에 빠져 죽은 아이들은 봉분도 묘비도 없이 한데 묻혔다.
선감묘역은 경기창작센터에서 약 700 미터 떨어져 있다. 묘역에 도착하니 마침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누가 묻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 가마니나 천으로 둘둘 말아서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선감학원가’ 노래 한 곡 불러주고 가는 게 전부였습니다.”(이민선 오마이뉴스 기자)
매년 열리던 추모제는 지난해와 올해 코로나19 여파로 열리지 못했다. 흩날리는 눈발이 쓸쓸한 느낌을 더하고 있었다. 2017년 경기도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곳에 묻힌 아이들의 시신은 약 150구로 추정된다.
경기창작센터 안에는 선감역사박물관과 함께 선감학원피해자신고센터가 설치·운영되고 있다.
“선감학원 피해자이면서도 신고를 못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나쁜 아이들을 모아서 교화시켰다’ 는 식으로, 선감학원의 성격 자체를 국가가 상당히 왜곡시켰습니다. 피해자들은 아직도 그런 오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나설 수가 없는 거죠. 그런 불명예를 빨리 벗겨줘야 되리라 생각합니다.”(정진각)
선감역사박물관 안 ‘선감학원 연표’의 마지막 줄에는 “진화위 선감학원 조사개시”라고 쓰여 있다. 선감도 르포 <소년들의 섬>을 쓴 이민선 기자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의 마지막 퍼즐”을 맞춰주길 기대했다.
“도시빈민의 아이들을 ‘부랑아’란 이름으로 타자화한 것 자체에도 국가폭력의 성격이 들어 있어요. 선감학원 사건이 국가폭력이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어주는 것, 그것이 진실화해위원회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4호(202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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