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동체에 박힌 ‘불안’을 뽑아내는 첫 단추”
[인터뷰] 다큐멘터리 <206: 사라지지 않는> 허철녕 감독
“<말해의 사계절>(2017) 촬영을 위해 4년 넘게 할머니를 봤는데도 할머니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이 뭔지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할머니가 가끔씩 전쟁이나 학살에 대해 들려주시곤 했는데, ‘할머니 슬픔의 근저에 저것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제 눈으로 그 현장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어요.”
2014년 ‘말해’ 할머니를 만나면서 모든 이야기는 시작됐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기록을 위해 말해 할머니를 만난 허철녕 감독. 70여 년 전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었다는 말해 할머니의 이야기는 허 감독의 발길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발굴 자원봉사자로 2017년 한 해를 보내고,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촬영은 2021년 에야 마무리됐다.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 다큐멘터리 <206: 사라지지 않는>(2021)이 그 결과물이다.
지난 12월 2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허철녕 감독을 만났다. 먼저 촬영 과정에 대해 물었다.
“사실 카메라를 든 시간만큼 같이 발굴에 참여한 시간이 많았어요. 발굴은 발굴대로 하고, 발굴이 끝나면 촬영된 소스들을 편집하고, 또 다음 발굴 일정이 잡히면 현장으로 가고, 이런 식으로 4년을 보냈어요.”
말해 할머니의 이야기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이끌리듯’ 찾아온 유해발굴 현장. 허 감독은 5년 전 그날의 느낌을 “묘한 기대와 막연한 불안감”이 공존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뜻밖의’ 발굴 현장 분위기에 놀랐다. 너무 엄숙하지도 무겁지도 않았고, “으쌰으쌰 열심히 해보자는 분위기가 신선했다”는 것이다.
“유족들은 80·90대이시고, 조사단의 주축 활동가들은 주로 50대, 다수를 차지하는 자원봉사자들은 제 또래인 20·30대였어요. 전 세대가 한 현장에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어요.”
현장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했다. 지게에 보급품(?)을 싣고 산속 현장까지 날라준 분, 손수 담근 김치를 가져온 분,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고 한번 왔다가 계속해서 현장을 지킨 대학생, 말년 휴가를 이용해 발굴 현장을 찾은 군인들, 자원봉사로 참여한 뒤 민간인 희생사건을 뮤지컬 작품으로 무대에 올린 배우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내가 힘을 보탤 수 있는 거면 뭐라도 하겠다”는 시민들이 있어서 발굴 현장의 분위기는 활기를 띠었다. 허 감독은 “그 감동을 영화 안에 다 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게 ‘사람들’이었어요. ‘저 사람들은 어떤 마음, 어떤 갈증 때문에 와 있는 거지?’ 2021년을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영화에 한번 담아보자는 작은 목표가 있었어요.”
영화에 소개된 충남 아산시 설화산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특히 여성과 아동의 유해가 많이 발견됐다. 최소 208명의 유해 중 아동은 58명으로 가늠됐다. 여성용 비녀도 89점이나 발견됐다. 폭이 1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두개골. 두 살 남짓한 아이의 척추뼈……. 비참하고 무참한 장면 앞에서 탄식이 앞선다.
땅속에 묻힌 유해들을 마주할 때면, 특히 유족들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다시 한번 느껴야 했다. 한편 조사단들에게는 다행스러운 마음 또한 들었다고 한다. ‘발굴 기간 내내 유해가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긴장을 늘 안고 있어야 했고, 실제로 유해를 하나도 발굴하지 못한 현장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하나의 애도 과정으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유해의 서사 라고 해야 할까요? 돌아가신 사람들과 산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과정이 영화 안에서 잘 보였으면 좋겠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의 애도 행위가 되고, 그분들을 잘 보내드릴 수 있는 과정으로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206: 사라지지 않는>은 전쟁과 학살로 가족을 잃은 사람과,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의 유해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제만 들으면 참 무겁고 애달프고 어쩌면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영화에 깔려 있는 감정은 사뭇 달랐다. 기록이나 고발로서 접근하기보다, 위로와 화해의 정서적인 접근이 두드러졌다.
보통 전쟁을 다룬 다큐 영화들을 보면,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의 진상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허 감독은 “그건 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감독으로서 제 역할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 영화는 지나간 상처와 비극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청년 세대가 어떻게 이것을 바라볼 수 있는지, 무엇을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예요. 뭐가 더 좋다, 안 좋다, 말할 수는 없는 주제죠. 다른 영화들이 ‘진실’에 주목해왔다면, 저는 ‘화해’라는 정서에 방점을 찍었다는 차이 같아요.”
허 감독의 이러한 접근은 영화제의 호평도 이끌어냈다. <206: 사라지지 않는>은 지난 10월 열린 부산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 작품상인 ‘비프메세나상’을 받았다. 외국인 심사위원들을 포함한 만장일치 결정.
허 감독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나 전쟁과 학살이 없던 나라가 없다”며, “제 영화는 전쟁 이후 비극의 자리에서 시민들이 뭘 할 수 있는지, 뭘 기억하고 뭘 애도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뤘기 때문에 그들(외국인 심사위원들)도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고 수상 이유를 짐작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에도 많다. 짐짓 합리적인 체하며 ‘경제성’이니 ‘국민통합’이니 핑계를 앞세우는 정치인들도 있다.
“우리 발 밑에 그분들(희생자들)을 두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자랑하고 있잖아요. 그분들을 밟고 선 대한민국이 과연 자랑스럽나요? 저는 별로 자랑스럽지 않았어요. 그런 비극들을 억지로 지워버리고 없는 척 했기 때문에,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위 ‘빨갱이’ 담론이 망령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있잖아요.”
허 감독은 1950년 상황에서 생각해보길 권했다. 민간인 희생사건으로 약 2,000만 인구 가운데 약 100만 명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고 전해진다. 허 감독은 “그런 사회가 되면 얼마나 불안하겠느냐”며, “본질적으로 유해발굴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불안함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행위”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허 감독의 기억은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진다. 바로 ‘세월호’. 300명 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무력감, 시신 인양 문제를 두고 ‘비용’을 운운하던 망언들이 던져준 분노와 허탈감. 세월호 사건은 지금의 청년 세대에게 고통과 트라우마로 각인돼 있다.
“세월호를 인양하고 희생자들을 수습함으로써 대한민국 사람들의 가슴 한 켠에 박혀 있던 트라 우마와 공동체에 대한 불신을 뽑아낸 거라고 생각 해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역시 그런 차원이 아닐까, 우리 공동체 안에 어딘가 박혀 있는 불안과 공포를 뽑아내는 첫 단추 같은 것 아닐까 생각해요.”
<말해의 사계절>부터 <206: 사라지지 않는>까지, 두 영화를 만들며 보낸 8년의 시간은 감독으로서, 또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허 감독의 세계관까지 바꿔놨다. 허 감독의 소회는 곧 우리를 향한 당부이기도 했다.
“더 많이 느껴요. ‘2021년에도 지속되고 있는 갈등의 시작은 바로 여기(민간인 학살)구나.’ 이 비극을 기억 하려 더 노력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른다고 이 갈등이 없어지진 않을 거예요. 누군가는 끊임없이 ‘빨갱이’들을 소환해내고, 그걸 이용해서 또 누군가를 가해할 거고, 그런 역사가 반복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06: 사라지지 않는>은 서울독립영화제와 인천인권영화제에서 관객들을 만났고, 내년 개봉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제목에 있는 “206”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 궁금증은 극장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4호(202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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