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처마라도 앞으로 조금 내서 비라도 안 맞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위령탑 앞에서 그의 목소리는 또 한 번 젖어든다. 경북 경주시 황성공원 안에 있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뒤에는 약 750위의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까닭 없이 끌려가 흔적 없이 죽어간 사람들. 가족들에게 뼈 한 조각 남기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곳이 바로 무덤이나 다름없다. 비록 돌에 새겨진 이름이지만, 아버지 어머니들의 이름이 가을날 찬비에 젖는 것조차 89세 노인의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한다.
노인의 이름은 김하종.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주유족회 회장이다. 지난 9월 28일 경북 경주시 성건동 유족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가족의 비극이 시작된 1949년 칠월 칠석날의 이야기부터 풀어 놓았다.
“민보단원들이 경주김씨 집안사람들하고 30명을 죽여놓고, 선친을 데리고 가서 ‘빨갱이한테 협조한 자들을 죽였으니 시체를 매장하라’ 했습니다. 선친께서 피범벅이 돼서 뒤엉킨 시신들을 보고 ‘옷이라도 갈아입혀 묻어주자’고 했다가 삽으로 매질을 당한 거라요. 사경을 헤맬 만치 맞고 지게에 실려서 돌아오셨습니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저녁, 김하종의 집에 의문의 사내가 찾아와 소를 끌고 가겠다고 했다. 그를 막아선 열일곱 살 김하종에게 사내는 권총을 꺼내 보였다. 마을 민보단장 정규준이 애써 말린 덕분에 사내는 총을 거뒀다. “니, 지켜볼 끼다”라고 말하며 돌아선 그 사내는 내남면 민보단을 지휘하는 이협우였다.
김하종은 목숨을 건졌지만, 아버지는 결국 9일 만에 숨을 거뒀다. “그때 내가 너무 철부지였어요”라고 말하던 김하종 회장은 가까스로 눈물을 참는다. 89세 노인의 붉어진 눈시울에 17세 소년의 얼굴이 비친다.
머슴살이까지 하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던 김하종에게, 선생님은 “법대에 가서 신사적 복수를 하라”고 조언했다. 그 말에 따라 간난신고를 견디며 공부에 매진한 끝에 법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졸업 후에는 법무부 형정국 (교정 담당부서)에 일자리를 얻었다. 공직생활을 1년 7개월 남짓 했을 무렵, 4·19혁명이 터졌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 지난 10년 숨죽여 지내던 유족들이 들고 일어났다. 국회는 민간인 학살 조사에 나섰고, 곳곳에서 유족회가 결성됐다. 김하종은 1960년 6월 법무부에 사표를 냈다. 선친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스물여덟 살 김하종은 경주유족회 회장이 됐다.
김하종은 당시 3선 국회의원이 돼 있었던 이협우를 고발했다. 살인과 방화 혐의로 이협우가 구속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족회로 신고가 빗발쳤다. 파악된 희생자 수는 860명까지 늘었다. 그해 11월 계림국민학교 에서 열린 위령제에는 4,000명이 모였다. 1961년 3월 이협우는 1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야말로 세상이 뒤집어진 거였다.
“이협우가 사형을 딱 받으니까 사람을 보내서 회유가 오는 겁니다. 유족회 그만두면 돈을 주겠다, 과수원을 주겠다……. 제가 ‘우예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게 뼈 팔아먹는 짓 아닙니까!’ 그래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뒤, 세상이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가족의 한을 풀겠다고 나선 유족회원들에게 또다시 ‘빨갱이’라는 낙인이 덧씌워졌다. 쿠데타 세력은 유족회 주요 인사들을 영장도 없이 체포·연행해 구금하고, 고문 등 가혹행위를 가하기도 했다.
“‘젋은이는 무슨 죄를 지었노?’ 묻길래 ‘죄 지은 거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푯말에 보니, 반공법도 집시법도 아니고 ‘반국가행위’라고 써놨어요. 반국가행위라니! 조선시대 같으면 역적이나 받을 죄명 아닙니까?”
쿠데타 세력은 사람부터 먼저 잡아놓고, 이들을 처벌할 법을 만들었다. 3년 6월을 소급 처벌하도록 정한 특수 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은 헌법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었다. 혁명재판소는 유족회 주요 인사들에게 ‘반국가 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며 사형·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했다.
심지어 유족들이 유골을 수습해 만든 합동묘와 묘비까지 파헤쳐지고 쪼개졌다. 전국 각지의 유족회는 철저히 파괴됐다. 경주유족회 역시 그동안 파악한 희생자 860여 명의 명단을 이때 압수당하고 만다.
김하종은 부산 중부경찰서 지하에 40일 동안 구금된 뒤, 서울형무소 즉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재판장 에서 “김하종의 죄는 극형에 처할 것이로되 청춘이 아까워서 무기징역을 구형한다”라고 한 검사의 말이 아직도 김하종의 귀에 생생하다. 김하종은 혈서까지 쓰면서 줄곧 무죄를 주장했다.
결국 김하종은 1962년 1월 혁명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년 8개월 뒤인 1963년 12월 정치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그런데 5·16쿠데타가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은 김하종만이 아니었다. ‘사형수’ 이협우는 김하종이 석방되기 약 7개월 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석방된 김하종을 기다리는 것은 ‘신원특이자’라는 딱지였다. 경찰은 매일 집에 와서 김하종을 감시했다.
“우리 어머니 택호가 대일댁인데, 형사가 동네 사람들한테 ‘대일댁 아들이 중죄를 지어가지고 내가 지키러 왔다, 저 집 아들은 이제 장가도 못 가고 앞으로 공직생활도 못한다’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닌 겁니다. 그 얘기를 어머니가 듣고 오셔가지고 ‘야야 이게 무신 말이고!’ 탄식을 하고 울더라고요.”
우여곡절 끝에 1969년 취업 허가가 나서 교직에 몸담게 됐지만, ‘요시찰 인물’이 되면서 정보과 형사들이 학교까지 드나들었다. 일상적인 감시와 통제 속에 김하종과 가족들의 고통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모친이 늘 ‘내가 죽고 난 후라도 유족회만은 하지 마라’ 하셨어요. 내가 모친의 유언을 어긴 거죠.(눈물) 그래도 유족회 활동은 어머니한테는 불효지만 아버지한테는 효도 아니겠나 생각하고…….”
어머니 이야기에 인터뷰가 몇 번 이나 끊어졌다 이어진다. 어머니라는 말만 입에 올려도 눈물이 차오른다.
2009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김하종과 한국전쟁 피학살자유족회 인사들이 5·16쿠데타 직후에 겪은 고초에 대해 “위법·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행위”라고 판단했다. 영문도 모르고 경찰서 지하실로 끌려간 날로부터 38년이 지나서야 ‘진실규명’이라는 네 글자를 받아 들게 된 것이다.
김하종은 2015년 경주유족회를 다시 창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어머니 유언까지 거스르면서 다시 유족회를 만든 이유는 1960년 그때와 똑같았다.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것. 김 회장은 2016년 한국전쟁 유족회 특별법 추진위원장까지 맡았다. 말 그대로 ‘문턱이 닳도록’ 국회를 드나 들었다. 80대의 그가 경주, 대구, 서울을 오가며 5년간 관계기관을 방문한 횟수만 약 90회에 이른다.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무고한 옥고를 치렀습니다. 87세 노인이 되어 유일한 생존자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80세를 전후한 우리 유족들이 또 얼마나 세월을 기다려야 할지, 그때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막막 합니다. 69년 동안 멈추지 않은 유족들의 통한의 눈물을 닦아주실 수 있도록 과거사법을 통과해주실 것을 호소 합니다.”(2019년 5월 2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위원회 발언)
김하종 회장의 호소처럼 과거사정리법은 개정됐고, 그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가 재출범했다. 70년의 한, 60년의 싸움. 그 모질고 지난했던 세월에도 김 회장은 “후회는 없다”라고 말한다.
“국가범죄에 시효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국가가 범죄를 저질러놓고 시효를 찾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이미 오랜 세월 너무 큰 고통을 겪어온 유족들에게 다시 고통을 줘서는 안 됩니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3호(202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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