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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조용수의 ‘마지막 발걸음’을 따라

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by 최규화21 2021. 12. 3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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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조용수의 ‘마지막 발걸음’을 따라
[탐방] 자유와 평화 향한 신념을 기억하는 공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보통 간수가 면회라고 하면서 데리고 나가다가, 저쪽 으로 가면 사형장인데, 그때 간수가 그쪽으로 어깨를 툭 민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주저앉아 우는 사람도 있고, 다시 뒤로 도망쳐 나오는 사람도 있고 그렇다는데, 조용수 사장은 하늘을 한 번 보고, 땅을 한 번 보고, 묵묵히 사형장으로 들어갔다고 해요.”(원희복 민족일보 기념사업회 이사장, KTV <영상기록 진실 그리고 화해 -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중)

 

마침 가을비가 내렸다. 사형장 주변으로 높은 담장을 쌓아, 형무소 안에서도 이곳은 보이지 않게 돼 있었다. 사형장 바깥문 앞에서부터 왠지 서늘한 기운이 느껴 지는 것 같았다. 한 걸음, 붉은 담장 사이에 난 작은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이 한 걸음이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마지막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지난 10월 8일 서울 현저동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았다. 과거 수많은 독립·민주지사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긴 곳.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노력과 희생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개소한 경성감옥이 서대문형무소의 시작이다.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을 바꿔 가며 1945년 해방까지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이곳에 가두고 목숨을 빼앗았다. 해방 후 1987년까지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는 동안에는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이곳에 수감됐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을 규명한 진보당 조봉암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5·16쿠데타 직후 피학살자 유족회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유럽거점간첩단 사건, 재일동포 간첩 사건 등을 비롯해 권위주의 시대 숱한 국가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 이곳에 갇혔고, 일부는 목숨까지 잃었다.

서대문형무소의 가장 귀퉁이, 입구에서도 가장 먼 곳에 사형장이  있다.  사형장은  1988년  제10·11·12옥사와 함께 국가사적 324호로 지정됐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 의왕시로 옮긴 뒤의 일이다. 그때 서대문형무소는 철거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자유와 평화를 향한 신념을  기억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남기려는  이들의 노력이 이어졌고, 덕분에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남아 있는 옥사와 건물들은 그 자체로도 전시물이 됐고, 그 내부는 전시공간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형무소 소장실과 간수들의 업무공간으로 사용되던 보안과청사는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옥사 내부 감방 안에도 독립·민주지사들을 기념하는 다양한 전시물들이 자리했다.

그 가운데 ‘재일동포 양심수’를 주제로 한 전시공간이 눈에 띄었다. 1970년대 이후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고난의 세월을 보내던 곳. 감방 안 전시물에 “무죄” 두 글자가 선명하다. 나무판에 뚫린 작은 구멍들로 표현된 “무죄”는, 구멍 사이사이를 통과하는 햇빛 덕분에 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재판부는 권위주의 통치시대에 위법·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심대한 피해를 입은 피고인에게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2010년 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 이종수의 재심 판결문 중)

 

옥사 밖으로 나와 담장을 따라 걸었다. 높이 4미터, 길이 1,161미터에 이르던 담장은 현재 앞뒤로 200미터 정도만 남아 있다. 결국 담장은 허물어졌다. 자유를 가두고 인권의 목을 죄던 담장은 과거의 유물로 남았다. 지금 수많은 역사의 진실을 가리고 선 벽들도 언젠가는 저 담장과 같은 운명이 되리라 믿는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3호(202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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