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많은 것을 지워지게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71년 전 ‘대전산내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전미경 대전 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에게도 그렇다.
“그 비참한 유해를 볼 때는 정말 가슴이 녹아 내리는 아픔이 느껴집니다. 아버님을 저런 구덩이에 방치해두고 제가 밥을 넘기고 살았다는 게 죄스러울 뿐입니다.” (전미경)
8월 2일 오전 10시 대전 동구 골령골(낭월동 13 번지 일대)을 찾았다. 한국전쟁 당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경찰과 헌병대 등에 의해 집단희생된 곳. 2010년 1기 진실ㆍ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최소 1,800명 이상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고, 그중 267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곳에서는 지난 6월 시작된 2021년 1차 유해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길이 40미터 정도의 구덩이 아래에는 유골들이 그야말로 ‘천지’였다. 그 수가 너무 많다 보니 오히려 ‘이게 뭔가’ 하고 현실감을 잃을 정도였다.
골령골에 있는 암매장 추정지만 모두 여덟 곳. 그곳들을 모두 이으면 길이가 무려 1킬로미터에 달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린다. 골령골에서는 지난해까지 모두 300여 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이번 유해발굴의 성과라면 먼저 대량 학살지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본격적인 유해발굴이 시작됐다는 점, 그리고 증언과 사진을 통해 알려진 긴 구덩이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임재근 대전산내골령골 대책회의 집행위원장)
현장을 돌아보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 발굴 단원과 자원봉사자들이 바빠진다. 거대한 방수포로 현장을 덮고, 삽을 들어 물길을 낸다. 물을 빼내느라 양수기까지 동원되고, 발굴단원들은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점심 무렵이 되니 비가 잠시 긋는다.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은 유해발굴 현장 가까이에 있는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임시 사무실. 유족들이 손수 기른 나물로 푸짐한 점심상을 차려주셨다. 전 회장을 비롯한 유족들은 매일같이 이곳으로 출퇴근하며 유해발굴 현장을 지키고 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장례를 못 치렀다는 것은 저희 자손들의 불효죠. 제 개인의 일이라면 제가 밥을 굶고 노숙자 생활을 할망정 아버님을 71년 동안 저 땅속에 방치했겠습니까? (아버님의 유해가) 71년이 지난 오늘에야 바깥세상에 나오시는데 자식 된 도리로 도저히 집에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전미경)
고마운 한 끼를 나누고 유해발굴 현장에 돌아왔다. 발굴단원과 자원봉사자들도 늦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10여 명의 발굴단 외에도, 지난 6월부터 연인원 3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귀한 시간을 쪼개어 함께했다. 이날 만난 자원봉사자 김창석 씨도 직장에 휴가를 내고 유해발굴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골령골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방송 다큐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알게 돼서 가슴이 참 아팠습니다. ‘이런 아픈 역사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가서 자원봉사라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김창석)
골령골 유해발굴은 내년까지 이어진다. 그뒤에는 이곳에 한국전쟁 전ㆍ후 민간인희생자 전국단위 위령시설을 조성할 계획이다. 2024년까지 약 4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추모관과 역사공원, 전시ㆍ교육관 등을 짓는다.
시간은 많은 것을 지워지게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말아야 할 기억이 있다. 유해발굴 책임연구원을 맡고 있는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는 우리가 기억하고 또 극복해야 할 역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왜 유해발굴을 하느냐’라고 물으시면,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서 한다’라고 말합니다.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으면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요. 70년 전 돌아가신 분들도 이제 편안하게 가시게 해드리고, 70년간 사회에서 소외돼 있던 유족들도 우리 사회 안으로 돌아오게 해드리는 의미가 있습니다.”(박선주)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2호(2021. 8.)
조봉암·조용수의 ‘마지막 발걸음’을 따라 (0) | 2021.12.30 |
---|---|
70년의 한, 60년의 싸움… “후회는 없다” (0) | 2021.12.30 |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은 미래세대 위한 시민교육” (0) | 2021.12.30 |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12년' 기록, 국민께 보고합니다 (0) | 2021.12.30 |
“개인의 선택 존중하는 ‘사람 중심’ 저출산 정책 기대” (0) | 2017.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