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나혜석거리는 조용했다. 양쪽으로 늘어선 주점이며 식당들은 대부분 문을 열지 않았다. 간밤의 분주함을 간직한 채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거리. 바닥을 쓰는 미화원의 비질 소리만 쓱쓱 들려왔다.
10월 7일 아침 경기 수원시 인계동의 나혜석거리를 찾았다. 수원시청 방향 입구에 돌로 만든 원기둥 형태의 조형물이 보인다. 앞뒤로 각각 한글과 영문으로 나혜석(1896~1948)을 소개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나를 나혜석거리로 이끈 책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나혜석 씀, 장영은 엮음, 민음사, 2018년)이다. 요즘 페미니즘이란 주제가 어느 때보다 뜨겁다. 나혜석이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 기수’라는 평가만큼이나 내게 매력적인 것은 또 있었다. 바로 나혜석의 ‘글쓰기’였다.
“나혜석은 칼자루를 쥔 남성 중심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칼날을 쥔 여성들이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과 글을 남겨야 한다고 믿었다.”(9쪽, 엮은이 서문)
이 책은 나혜석이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남긴 글을 모은 책이다. 자신의 삶과 생각을 기록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삶과 생각의 주인임을 자각하는 일. 엮은이는 “나혜석은 자기 생애를 스스로 글로 남기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 속에 ‘자기’가 없는 채로 영영 왜곡되거나 사라지게 될 것임을 더욱 크게 받아들였을 것”(150쪽)이라고 해설했다.
책은 나혜석을 “논설과 문학을 넘나드는 문필 활동”을 한 소설가이자, “3·1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조직하다가 체포”된 독립운동가이자, “만삭의 몸으로 국내 최초로 유화 개인전을” 연 화가라 소개했다. 하지만 지금도 나혜석을 ‘이혼 스캔들’과 ‘행려병자로 생을 마친 비극적 최후’로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엮은이는 “우리는 아직도 신여성을 식민지 사회에서 특이하고도 신선했던 볼거리 대상으로 접근하고 소비한다”며, “그런 관점과 담론은 언제나 여성을 역사의 가장자리로 밀어낼 뿐”(10쪽)이라고 비판했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을 토요일 밤. 그래서 번화가의 일요일 아침은 차분하면서도 쓸쓸하다. 문 닫은 음식점들 사이로 걸음을 옮기니 거리 가운데 나혜석상이 서 있다. 동상은 두 손으로 캔버스와 가방을 들고 있다. 오른발은 반걸음쯤 앞으로 내딛었고, 시선은 저 멀리 어떤 곳을 보고 있다.
수원은 나혜석의 고향이다. 나혜석거리의 간판들 속에 ‘나혜석’이란 이름이 보인다. “○○주점 나혜석점”, “××식당 나혜석거리점” 하는 식이다. 맛집거리의 상징이 돼버린 나혜석. “마치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연구가쯤 되는 것 같다”(2017년 3월 6일 e수원뉴스, 이대규 시민기자)라는 한탄이 이해된다.
나혜석거리가 조성된 것은 지난 2000년. 하지만 ‘나혜석과 상관없는 곳을 나혜석거리로 지정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나혜석거리를 ‘제2의 나혜석거리’라 부르고 나혜석 생가터를 중심으로 ‘제1의 나혜석거리’를 명명하자는 주장도 있었다.(2012년 9월 18일 수원일보, 김훈동 수원예총 회장 칼럼)
2016년에는 나혜석상과 대형 비석이 상점을 가린다는 이유로, 상인들이 이전을 요구한 적도 있다. 수원시가 나혜석 생가터로 동상을 옮기겠다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지만 반대 여론 때문에 실행되지는 못했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휴머니스트, 2018년)에 “단언컨대 ‘모성’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악질적으로 남용되는 단어다.”라고 썼다. 지금도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가 있어’, ‘엄마라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지’ 하는 말 앞에 수많은 여성들은 좌절한다. 더 많이 희생한 여성은 ‘모성이 훌륭한 엄마’로 박수 받는다. 반대로 ‘모성이 부족한 엄마’가 되는 순간, 자식에 대한 죄책감과 사회적 비난에 시달려야 한다.
모성은 강요되고 있다. 모성이라는 단어는 마치 모든 여성이 ‘원래부터’ 엄마로서 태어난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100년 전 나혜석도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경험에서 오는 감정’이라며, 모성이라는 신화에 저항했다.
“모성애로 인하여 얼마나 만족을 느꼈으며 행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모성애에 얽매여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비참한 운명 속에서 울고 있는 여성도 적지 아니하외다. 그러면 이 모성애는 여성에게 최고 행복인 동시에 최고 불행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193쪽, ‘이혼 고백장’ 가운데)
요즘도 많은 여성들은 ‘왜 좀 더 부드럽게 이야기하지 못하느냐’는 식의 질문, 또는 항의를 받고 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직접 목소리 내는 여성의 ‘말’이, 그 내용 자체보다 방식이나 태도 때문에 문제시되는 경우는 지금도 허다하다. 엮은이는 “여성의 삶이 모순적이고 분노와 좌절의 연속인데, 어떻게 여성의 언어가 아름답고 완전하고 완벽하기를 바라느냐는 나혜석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233쪽)고 평가했다.
100년 전의 과거라면 오죽했을까. 1923년 나혜석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여성의 입장에서 ‘최초로’ 표현한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백결생이란 필명의 논객이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 등의 표현을 문제 삼아 비판 글을 발표하자, 나혜석은 즉시 ‘백결생(百結生)에게 답함’이라는 글로 다시 대답했다. 가장 “거슬리는 말”은 동시에 가장 “용감한 말”이었다.
“옳다. 씨의 반박의 중요 문구는, 즉 내 감상기 전문 중 나의 제일 확실한 감정이었다. 제일 무책임한 말이었고, 제일 유치한 말이었고, 제일 거슬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몇 구절은 나의 제일 정직한 말이었고, 제일 용감한 말이었다.”(267쪽, ‘백결생(百結生)에게 답함’ 가운데)
아침 해를 마주 보며 나혜석거리의 끝까지 걸었다. 의자에 앉은 나혜석상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뒤로 거대한 벽과 같은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나혜석의 시 ‘인형의 가(家)’가 새겨져 있고, 가운데 세로 방향으로 큰 틈이 나 있다. “뒤의 커다란 벽은 나혜석이 생전에 온몸으로 부딪혔던 사회의 보수적 벽을 상징하며, 흡사 소나무 형상으로 갈라진 틈은 사회의 벽을 깬 신여성의 진취적 면모를 의미한다”고 설명돼 있다.
거리엔 드문드문 낙엽도 보인다. 누군가 나혜석상의 상체에 셔츠를 입혀놓았다. 나혜석의 시선은 어느 곳을 향하는지 동상 옆에서 눈높이를 맞춰봤다. 맛집이 빼곡하게 늘어선 ‘나혜석 없는 나혜석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미투’로 들끓고 있는 100년 뒤의 우리 사회를 내다보고 있는 건지 알쏭달쏭할 따름이었다.
“세상이 여자들의 말로 들끓는 중이다. 더는 외롭지 않다고 외치는 우리는 외로움을 견딘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한 줌의 지지가 도착하기 전에,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기대어 입을 연 여성들이 결국 오늘 우리를 말하게 한 것이다.”(332쪽, 이민경 ‘추천의 글’)
- 월간 작은책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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