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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터뷰] 불통의 교육이 만든 비극... 설민석에게 ‘사도’를 듣는다

긴 글/인터뷰와 현장기사

by 최규화21 2015. 10. 3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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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파크도서 북DB

[저자인터뷰] 불통의 교육이 만든 비극... 설민석에게 ‘사도’를 듣는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우리의 뿌리를 공부하는 일이기도 하고, 물론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선조들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깨닫고 배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과오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 <버림받은 왕자 사도> 184쪽


옛날 역사책들 이름이 주로 ‘거울 감(鑑)’자로 끝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버림받은 왕자 사도>의 저자로 만난 설민석 강사는 그것이 ‘항상 역사를 귀감 삼아 현실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 이후 영화를 통해 역사를 해설하는 영상 강의를 꾸준히 해온 설민석 강사. 그는 ‘사도’를 통해 일곱 번째 영화 해설 강의를 진행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버림받은 왕자 사도>를 펴냈다.


그의 강의는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중요한 역사적 지점들을 놓치지 않는 것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버림받은 왕자 사도> 역시 막히는 곳 없이 술술 읽힌다.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재구성된 이야기를 따라 읽다가 그의 역사 강의를 만나게 되고, 역사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간 심화 강의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거울로서의 역사’를 이해하게 된다. ‘사도’라는 영화를 콘셉트로 만들어진 책이지만, 영화를 보고 안 보는 것과 무관하게 책은 책대로의 이야기를 충실히 담아냈다.

인터뷰를 하며 설민석 강사가 가장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인 때는 수능시험 전 마지막 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과거에는 마지막 강의 때 수험생들에게 “이제 영원히 보지 말자”라고 인사했다고 한다. 그를 다시 본다는 것은 재수를 한다는 의미이니까. 하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역사 해설 강의를 시작한 뒤로 그는 “한 달 뒤에 만나자, 유튜브에서.”라고 인사한다. 그렇게 인사할 수 있는 게 정말 행복하다며 그는 웃었다.

역사의 대중화를 소신으로 삼고 있다는 설민석 강사. 자신의 꿈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역사는 설민석”이라는 한마디 모토로 설명하는 그에게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백성 사랑한 성군이자 성공한 정치인 영조, 아버지로서는 빵점”


Q 수험생들을 가르치기에도 굉장히 바쁘실 텐데, 영화를 통한 역사 해설 강의도 꾸준히 해오고 계십니다. 어떤 이유에서 역사 해설 강의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 때가 처음이었죠. 영화에 대동법 같은 광해군의 업적들이 나오는데 일반 관객들이 보기에 어려운 거죠. 사극은 아는 만큼 재미있어지잖아요. 그래서 영화 해설 강의를 부탁받은 것이 시작이었어요. 그 다음 ‘관상’, ‘역린’, ‘명량’, ‘국제시장’, ‘암살’, 이번 ‘사도’까지 관객 수를 더하니까 한 7천만 되더라고요.(웃음) 저의 꿈이자 소신이 ‘역사의 대중화’예요. 감사하게도 저한테 주어진 재능이 있어서 운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물론 본업에도 충실해야죠. 대중 강의는 잠 한두 시간 덜 자고 밥 먹는 시간 아껴서 짬을 내서 하고 있습니다.


Q 1단계 소설 형식의 이야기, 2단계 역사특강, 3단계 심화특강으로 나눠진 책의 구성이 좋았습니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2단계까지만 보고 조금 더 알고 싶은 사람은 3단계까지 읽어볼 수 있게 해서, 쉬운 것부터 어려운 것까지 차근차근 따라 읽기가 좋더라고요. 이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온 건가요?

제 아이디어예요. 제가 필력 있는 사람이 아니고, 강사니까 강의를 최대한 살리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영화감독들만 발칙한 상상 하란 법 없잖아요. 사도의 인생에서 중요한 몇 장면을 잡아서 최대한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여 상상력을 발휘했죠. 그렇게 소설 형식으로 흥미를 주고 뒤에서 강의로 풀고. 그런데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조금 아쉬울 수 있거든요. 그런 분들 위해서 마지막에 심화편을 수록했어요.

<설민석의 무도 한국사 특강>을 빼고 영화를 콘셉트로 한 책들은 다 이런 형식이에요. <전쟁의 신 이순신> 같은 경우는 이순신의 인생에서 열 명의 인물을 뽑아서, 그 인물이 바라본 이순신의 모습을 장면으로 담았어요. 소설-강의-심화라는 구성은 바뀌지 않지만, 시간대를 중심으로 가는 경우가 있고 인물의 시각을 중심으로 가는 경우도 있어요. 큰 틀 안에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거죠. 이걸 특허를 낼까?(웃음)


Q 책 내용으로 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영조를 ‘백성을 사랑한 군주’라고 왕으로서는 높이 평가해주셨어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성군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수능 출제율이 말해줘요. 업적이 없는 왕은 정답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성군일수록 많이 출제되죠. 영조는 업적이 굉장히 많아요. 먼저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의 속편인 <속대전>을 편찬했어요. 붕당정치를 뿌리 뽑으려고 탕평책을 실시했고, 셰프이기도 하셨죠. 영조가 만든 탕평채의 주재료가 청포묵일까요? 방위색이란 게 있어요. 서백호-서쪽 하얀색, 동청룡-동쪽 푸른색, 남주작-남쪽 붉은색, 북현무-북쪽 검은색. 당시 집권세력이 서인이니까 주재료가 하얀색 청포묵인 거예요. 거기다 검은색(북) 김을 뿌리고 붉은색(남) 쇠고기, 푸른색(동) 미나리를 막 버무립니다. “너희들도 이거 먹고 좀 합쳐봐.”

백성들을 위한 정책들도 많이 펴셨어요. 압슬(壓膝) 같은 잔인한 형벌들을 폐지시켰죠. 그리고 삼심제를 시행해서 사형수에 한해 세 번까지 항소하고 상고할 수 있게 해준 거죠. 또 노비공감법으로 노비들이 주인에게 바치는 공납품을 반으로 줄여줍니다. 농민도 문과 시험은 볼 수 있는데 서얼은 문과 시험을 못 보게 돼 있던 것을 영조가 그것도 없애버렸어요. 호부호형을 허락하는 등 통청윤음(通淸綸音)을 통해 서얼들의 권익을 높여주죠. 금주령도 내렸어요. 영조도 술을 좋아하는데, “백성들 밥해먹을 쌀도 없는데 그걸로 술 담가먹고 앉아 있냐!” 하고 금주령을 내려서 본인도 술을 안 드신 거예요. 거기도 애민정신이 들어 있는 거죠.

그 이면에 영조 본인이 첩의 자식이고 노비의 자식이라는 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어렸을 때는 사가(私家)에서 백성들하고 같이 뛰어놀고 옷 찢어지면 꿰매 입고, 그렇게 자라셨거든요. 그렇게 백성들과 소통하고 스킨십을 나눈 것이 성군을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Q 그 여러 가지 정책 중에, 정치인으로서 영조 최고의 정책으로는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탕평책이죠. 노론 마을 소론 마을, 마을들이 있으면 거기에 서원이라는 학교들이 만들어져요. 서원의 멘토, 관직에 나가지 않은 서원 최고의 영수를 산림이라고 해요. 말 한마디로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존경받는 사람. 산림이 어떤 이슈에 대해 ‘이거다’ 하고 정하면, 그 말을 듣고 궁궐에 있는 노론과 소론이 한판 붙어요. 요게 붕당이거든요. 붕당의 뿌리가 서원이고, 붕당의 꽃이 산림이에요. 영조는 이걸 뿌리 뽑으려면 서원 수를 줄여야 한다면서, 1000개나 되는 서원 수를 647개로 줄이고 산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영조 최고의 정책을 꼽자면 당연히 당평책이죠.

 


“아이의 첫 번째 선생님은 부모... 자식을 아바타로 여기는 데서 반목 생겨"


Q 그런데 어진 군주였던 영조는 자식에게는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백성을 사랑한 왕으로서의 영조와, 자식과는 불통과 갈등만 거듭했던 아버지로서의 영조. 어떻게 해서 이처럼 큰 간극이 생겨났을까요?

왕으로서의 역할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대해 역할갈등의 우위를 차지한 것 같아요. 그런 일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하다고 봐요. 정치인 집안이나 재벌가에서는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식들을 옥죄는 경향이 나타나죠. 재화든 권력이든 너무 넘치게 되면 업이 되고 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영조가 평범한 집안 사람이었다면 그런 사달이 났겠습니까? 저는 아버지로서 영조는 빵점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면에는 본인의 트라우마가 있었죠. ‘우리는 잠시도 긴장을 늦추거나 해이해지면 대신들한테 잡아먹힐 수 있으니 사도 넌 나처럼 강해져야 해’라는 생각을 너무 엄격하고 권위적으로 주입시키려 한 거죠.


Q 책에 보면,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을 겪고 왕이 된 정조와 연산군이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된 까닭을 ‘사랑’의 차이라고 보셨습니다.

정조하고 가장 비슷한 왕이 연산군입니다. 달라 봐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느냐(정조) 어머니가 돌아가셨느냐(연산군) 하는 건데, 극명하게 다른 왕이 됐죠. 왜? 결정적으로 다른 건 연산군은 어릴 때부터 대화할 상대가 없었다는 것밖에 없어요. 아버지 성종도 입을 닫았고, 할머니도 자신을 미워한 거죠. 성종이 “백년간 (폐비 윤씨의 죽음을) 입 밖에 내지 말라” 하니, 근처의 나인이나 상궁, 내관들이 다 입을 닫고 도망갔고요.

반면 정조는 다행히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많이 받아요. 영조는 아들 사도에게는 엄격하게 했으면서도 손자 정조에 대한 사랑은 컸어요. 정조가 사도와 다르게 세손다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죠. 그리고 ‘만약 이산(정조)이 없었으면 이선(사도)이 살았을 수도 있다’는 말도 있어요. ‘손자가 똑똑하니까 아들이 없어도 손자한테 나라를 물려주면 된다’는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하는 거죠. 특히 어머니의 사랑이 유별났기 때문에 그 불행 중에 흙탕물 속에서 연꽃을 피우지 않았나 생각해요.
연산군에게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베푼다는 말을 많이 해요. 연산군은 받아본 사랑이 없으니까 베풀 수가 없었고, 정조는 받은 사랑을 백성들한테 베푼 거죠. 불통은 역적을 낳고 소통은 성군을 낳는 겁니다. 아버지와 소통이 끊겨서 사도세자가 죽었잖아요. 아버지가 “너 나 죽이려고 그랬어?”라고 의심해서. 궁궐에 같이 살면서 서로 대화가 없었어요. 1년 만에 만나요. “밥 먹었냐?” “먹었습니다.” 그러고 보는 앞에서 영조가 귀를 씻고 물 끼얹고 가버리죠. 그러니 사도가 안 미쳐버릴 수가 없죠.


Q 책의 머리말부터 ‘소통의 교육’을 강조하신 것을 봤습니다. 소통교육의 반대는 불통교육일 텐데, 현재로 시선을 돌려봤을 때 ‘불통교육’의 사례라고 할 만한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불통교육의 키워드는 닦달, 의심, 야단, 권위, 이런 것들이에요. 아이는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주는 아바타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걸 간과해요. 영조도 자기 몸에 흐르는 천민의 피를 세탁해줄 수 있는 게 사도라고 본 거예요.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니까 분노한 거잖아요.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부모님들이 자식이 우리 가문을 일으켜 세워주거나, 부모가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길 바라요. 그러니 반목이 생기는 거죠.

소통교육의 키워드는 기다림, 감싸줌, 격려, 칭찬, 사랑, 용서, 이런 것들이에요. 어머니 아버지가 과연 청소년들한테 어떤 의미일까요? 어머니는 혼내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 아버지는 돈 벌어다주는 사람. 그게 불통의 교육인 거예요. 지향해야 할 부모님 모습은 세상이 다 외면해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 나를 감싸주는 사람, 마음속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나의 멘토, 나의 스승님이에요. 아이가 태어나서 첫 번째로 만나는 선생님이 부모님 아니겠습니까? 흔히들 ‘내 아이는 최고의 선생님한테 배우게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시는데, 본인이 최고의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한 적은 있는지 반성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Q 그런데 제가 한 신문기사를 보니, 학부모님들 사이에서 자녀와 함께 영화 ‘사도’ 보기 열풍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부모님 말씀 안 듣고 공부 열심히 안 하면 큰일 난다’ 하는 교훈을 주려고 거라고 하더군요.

반대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자식이 부모의 손을 잡고 가서 봐야 될 영화죠. “어머니 아버지 저거 좀 보세요. 자식을 믿지 못하고 들들 볶으니 결국 저 끝이 뭐가 됩니까? 그러니 우리도 이제 마음 열고 대화합시다.” 저는 ‘사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좀 변했으면 좋겠어요. 옛날 역사책 이름이 주로 ‘거울 감(鑑)’자로 끝나는 것은 항상 귀감이 되라는 의미거든요. 역사에는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죠.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교훈을 얻고, 내가 변하는 데까지 가야 완벽하게 역사를 공부한 거예요. 모든 집단의 최소 단위가 가족이잖아요. ‘사도’ 영화나 제 책을 계기로 부모자식 간에 마음을 열게 되면 좋겠습니다.


Q 지금 한국사회의 최대 이슈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 밖으로는 독도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동북공정 문제 등 ‘역사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납니다. 역사가 대체 뭐길래, 과거의 역사가 이렇게 지금의 현실 속에서도 계속해서 쟁점이 되는 걸까요?

어느 나라나 역사가 중요하지 않은 나라는 없겠지만, 우리나라는 70년밖에 안 된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잖아요.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크게 덧났어요. 우리 민족이 마음이 넓은 민족이에요. 역사적으로 그렇게 일본한테 당했지만, 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국교 재개하고 쌀도 주고 그랬어요. 그걸 지겹게 반복합니다. 저는 가해자의 책임이 크다고 봐요. 독일 총리는 유대인 수용소 찾아가서 무릎 꿇고 하잖아요. 일본도 식민지배에 대해 배보상을 떠나서 진정한 의미의 사과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역사가 한으로 남아서 더 뜨거울 수밖에 없는 거죠.

 


“입시에 한정된 강의에 아쉬움... 역사의 대중화는 내 꿈이자 소신"


Q 요즘 젊은이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를 많이 배우시잖아요. 그런데 좀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영화를 통한 역사 해설 강의를 많이 해오셨는데, 어떤 점을 당부하고 싶으신가요?

빛과 그림자가 있죠. 장점으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점. 단점은 각색을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시는 분들한테는 흥행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재미 요소는 갈등과 반전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한쪽은 나쁜 놈을 만들어놔요.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해야 재밌거든요. 이런 것들이 그림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을 통해서 관련 영상물을 찾아서 시청하는 것, 서점에 가서 관련 책들을 한번 들춰보는 것이 좋습니다.


Q 좀 개인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이 되겠는데요, 인터뷰 서두에, ‘역사의 대중화’를 소신으로 삼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 소신을 어떻게 해서 갖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가장 소중하긴 하지만, 제 강의가 입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쉬웠어요. ‘이런 얘기도 해주고 싶다. 이런 교훈도 있는데.’라고 생각해도 얘기하면 안 돼요. 학생들의 시간을 뺏는 거니까요. 그래서 제가 혼자 만주도 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도 가고 백두산도 가면서, 역사 답사 영상을 10년 전부터 만들어왔어요. “이게 시험에 나오진 않지만 머리 식히는 겸 봐두면 역사공부에 도움이 될 거다”라고 하면서 인터넷에 무료로 올려놨거든요. 그 영상들이 차곡차곡 쌓여갔죠.

그런데 ‘명량’ 강의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설민석이 누구지?’ 하고 찾아 들어와서 그 영상들을 본 거죠. 하루아침에 반짝 재밌는 영상 하나 만든 사람이 아니라 10년 전부터 답사 영상을 만들어온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신뢰가 생기고 소통하게 되더라고요. 하루아침에 역사 대중화를 하겠다고 나선 건 아니에요. 옛날에는 수능 시험 전에 학생들에게 “우리 이제 영원히 보지 말자”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어요. 다시 보면 재수한다는 얘기잖아요. 지금은 마지막 인사를 “수능 치고 한 달 뒤에 만나자, 유튜브에서.”라고 인사해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해요. “요람에서 무덤까지, 역사는 설민석” 이게 제 꿈입니다.


Q 영화 ‘사도’를 통해서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더 읽어보면 좋을 만한 책을 권해주신다면 어떤 책을 권하시겠습니까?

<한중록>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도세자는 기록이 없어요. <조선왕조실록>에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말도 없어요. 영조 실록에는 그냥 “안에 가두었다”. 정조 실록에는 “일물(어떤 물건)에 가두었다”. 뒤주라는 건 <한중록>에만 나와요. 정조 때 ‘세초’라고, 사도세자 기록을 물로 다 씻어내 버려요. 영조와 정조한테 사도는 영원히 묻어두고 싶은 금칙어죠. 가장 직접적이고 가슴에 와닿도록 쓴 유일한 책이 <한중록>이에요.

물론 한계는 있죠.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서인 노론의 영수인 홍봉한이니 주관적으로 쓰지 않았겠느냐’ 하는데, 주관적이지 않은 기록이 어디 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객관적입니까? 그럼 왜 선조 실록이 나온 다음에 선조 수정실록이 나왔겠어요? 선조가 죽은 다음 집권한 북인이 선조 실록을 썼어요. 그런데 북인이 쫓겨나고 집권한 서인이 ‘북인이 쓴 선조 실록은 잘못된 역사 아니냐’ 하고 다시 쓴 게 선조 수정실록이에요. 그런데 서인은 북인의 역사 기록물을 훼손하지는 않았어요. 북인의 주장을 다르다고 생각했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은 거죠. 그런 건 배워야 된다고 봐요.


Q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서 앞으로 계획하고 계신 또 다른 콘텐츠가 있나요?

<조선왕조실록>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너무 어렵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영상 강의와 책으로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분량은 가급적이면 한 권으로 만들려고 하고요. 그 다음으로는 ‘설민석의 한국통사’라고 해서, 선사시대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의 압축해서 볼 수 있게 구상 중입니다.


Q 오늘 이야기와 직접 상관은 없지만 이 질문은 마지막으로 여쭤보고 싶습니다. 수능이 정말 코앞입니다. 수험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심신 관리를 잘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수험생들을 20년째 보고 있잖아요. 수능날 잠을 못 자서, 아파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아쉬운 결과를 맞는 친구들 정말 많거든요. 학습적인 얘기를 하자면 새로운 걸 하려 하지 말고 쌓아온 내용을 잘 정리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불안하면 이것저것 문제집만 막 사요. 그런데 사면 살수록 부담으로 쌓이거든요. 내가 1년간 공부해온 손때 묻은 내 책으로 오답을 정리하고 지금까지 별표 친 것들 다시 한번 다지는 정도로 시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수험생 만세!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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