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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청소년문학의 전설”이라고 칭찬하는 책을 만들어놓고도 본인은 쑥스러워하기만 했다. 겸손하게 대답할 필요 없다고 부추겼더니 “본질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다”는 한마디가 나왔을 뿐. ‘사계절 1318문고’ 100권 출간을 계기로 만난 김태희 사계절출판사 아동청소년문학팀장 얘기다.
7월 15일 출간된 <세븐틴 세븐틴>은 사계절 1318문고의 100번째 책이다. 청소년문학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1997년 첫 책이 나온 뒤로 올해 100번째 책이 나오기까지 18년이 걸렸다. 김태희 팀장은 “공식적으로는 기쁜데 비공식적으로는 씁쓸하다”고 애매한 소감을 전했다. 18년 동안 꾸준히 걸어온 길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느끼지만, 청소년문학의 현실을 생각하면 기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세월호 사고 이후에 생긴 부채의식 때문에 책의 방향까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계절 1318문고가 세상에 나온 그해 출판편집자로 일을 시작한 김태희 팀장. 19년차 편집자인 그에게 편집 일이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이다. 그는 작가의 원고를 읽는 ‘최초의 독자’로서 기본에 충실한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올 ‘101번째’ 사계절 1318문고는 어떤 책일까? 그의 바람대로 “기존의 것들을 다 뒤엎을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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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째 사계절 1318문고 <세븐틴 세븐틴>
“청소년문학과 사계절 1318문고는 동의어”... 본질 지키려는 노력에 자부심
Q 먼저 사계절 1318문고 100번째 책을 세상을 내놓으신 소감부터 말씀해주시죠.
공식적으로는 기쁜데 비공식적으로는 좀 씁쓸하기도 해요. 지금 청소년들이 책을 읽을 시간이 많지 않잖아요. 문학 작품을 읽는 기쁜 중에 하나가 자기는 겪어보지 않은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면서 공감도 하고 좀더 넓은 세상을 보기도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의미에 맞게 청소년들이 책을 읽을 여유를 갖고 있는지 생각하면 씁쓸하죠. 또 청소년 책을 만드는 저도 그렇고 청소년문학을 하는 작가들한테는 트라우마가 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있었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에 청소년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너무 커진 거죠.
‘과연 문학이 청소년들을 구할 수 있을까’ 하고 물었을 때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원래 100번째 책만큼은 뭔가 기발하고 발랄하게 해보자고 기획했는데, 세월호 사고가 터지면서 그 이후에는 누구도 ‘우리가 기획한 방향으로 그냥 가자’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된 거죠. 100번째 책이라는 것, 이만큼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도 느끼고 기쁘지만, 우리 청소년문학이 과연 독자들을 잘 만나고 있는지 생각하면 조금 기쁨이 덜하기도 해요.
Q 1997년 1권 출간 당시로 돌아가볼까요? 왜 ‘청소년문학’이었나요?
1990년대 말은 아동문고, 초등학교 고학년 동화들이 붐을 일으키던 때였어요. 청소년문학이라는 말은 생소했거든요. 그때는 제가 다른 출판사에서 일할 때였는데, 사계절 1318문고가 나오는 걸 보면서 ‘쟤네 참 신기하다’ 생각했죠. 놀라웠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제가 사계절에 와서 그 일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요.(웃음)
당시에는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는 작품들이 별로 없었죠. 청소년들을 보고 ‘굴러가는 낙엽만 보고도 웃는 나이’라고 말들을 하잖아요. 가장 감성이 충만하고 모든 것과 교감을 할 수 있는 나이인데, 그들이 ‘우리 얘기’라고 생각하며 읽을 수 있는 문학은 없었단 말이죠. 그런 청소년들에게 자기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콘텐츠를 주고 싶었어요. 마침 그때가 책 읽는 운동과 학교도서관 운동이 막 일어난 때여서, 사회적 분위기가 잘 맞아떨어졌어요.
제가 2004년에 사계절로 옮기고, 제 기억으로 2000년대 중후반부터 청소년문학이 급부상했어요. 청소년문학 시장이 블루오션이라는 기사들도 막 나고 그랬죠. 다른 출판사들은 그때 청소년문학을 시작해서 벌써 50권 넘게 펴낸 곳도 많아요. 그런데 저희는 1997년에 시작해서 2008년에 50권을 냈고 이제 2015년에 100권을 채웠으니까, 남들보다 속도는 더딘 편이거든요. 그래도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우리가 가는 길 가야지’ 하고 있어요.
Q 청소년문학이 지금처럼 자리 잡기까지, 사계절 1318문고의 역할을 자평하자면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사계절 1318문고는 청소년문학의 전설이 됐다’고 해주셨고요, 원종찬 평론가 분도 ‘청소년문학과 사계절 1318문고는 동의어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저희도 청소년문학의 본질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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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곳에 모은 사계절 1318문고 100권
공무원이 꿈이라는 청소년들에게 삶의 의미 전해줬으면
Q 사계절 1318문고가 걸어온 18년의 길을 돌아볼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가는 누구일까요?
가장 고마운 분이 박상률 선생님이에요. 처음으로 ‘내가 청소년소설 작가다’라고 규정하고 소설을 쓰신 분이죠. <봄바람>은 교과서에도 실리고 책도 많이 팔렸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 작품은 청소년소설의 전범이 될 만하다고 꼽을 수 있거든요. 박상률 선생님은 지금도 꾸준히 청소년소설 작품을 쓰시면서 지금 독자들에 맞게 스스로 잘 변화하고 계세요. 청소년소설에 대한 애정도 굉장히 강하시고 자부심도 있고요. 또 한 분은 김해원 선생님인데, <열일곱 살의 털>로 6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으셨어요. 그분도 청소년소설이 아닌 ‘성인소설’을 포함해서 작품성으로는 ‘톱클래스’에서 절대 빠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박지리 작가라는 분이 있어요. 이분은 전공도 문학이 아니고 글쓰기 공부를 체계적으로 한 적이 없는 분이에요. <합체>로 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았는데, 그때가 스물다섯 살 때였어요. 저는 독자이자 편집자로서 박지리 작가를 정말 사랑하거든요. 문학이론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스토리를 정말 잘 아는 작가예요. 도식적인 장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더 좋고 재밌는 것 같아요. 작가들 사이에서도 박지리 작가 팬이 많은데, 본인만 모르고 있어요.(웃음) 정말 매력적인 작가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가예요.
Q 국내 청소년문학 작가들을 발굴하기 위해 2002년 시작한 사계절문학상은 ‘수상자 없음’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지난해 13회 공모 때도 대상 수상작이 없었고요. 올해 14회 공모가 시작됐는데 대체 어떤 작품을 기다리고 계신 건가요?
초기에는 ‘짝수문학상’이라고 그랬어요. 2회, 4회, 6회, 8회에만 대상 수상자가 있었거든요. 뭔가 완전히 새롭고 기존의 것들을 다 뒤엎을 수 있는 작품이 응모되면 좋겠어요.(웃음) 보통 문학상 공모는 장편 위주인데 저희는 단편집도 응모를 받거든요. 12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은 <델 문도>가 단편집이에요. 최상희 작가가 처음으로 단편집으로 상을 받았고, 굉장히 호평을 받았어요. 단편집을 심사 대상에 넣은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새로운 것. 추리물이든 스릴러든 미스터리든, 그런 새로운 것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Q 사계절 1318문고와 사계절문학상을 통해 이루려는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이 책을 읽은 청소년들은 좀 더 편견 없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공감하고 연민하는 능력이 커지면 좋겠어요. 최근에는 너무 경쟁이 심하고 친구가 없어진 세상이 돼버렸어요. 지금 청소년들이 가장 불쌍하다고 느끼는 게, 태어나자마자부터 최고의 스펙을 쌓은 20대 선배들이 비정규직밖에 될 수 없는 것을 보면서도 그 길을 똑같이 가야 한다는 거거든요. 우리나라에 굉장히 많은 직업이 있는데도, 청소년들한테 꿈이 뭐냐고 물으면 ‘공무원’, ‘선생님’, ‘대기업 직원’ 이런 것들만 말하잖아요. 정말 충격 받았거든요. 청소년문학 안에서 주인공이 겪는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즐겁고 의미 있는 건지’ 충분히 느끼면 좋겠어요.
Q 그런 마음으로 만든 책인데, 독자들과 잘 소통하지 못해서 아까운 책들도 있을까요?
많아요. <바람의 딸 샤바누>라는 작품이 있는데, 파키스탄 유목민 소녀 이야기예요. 우리나라보다 훨씬 자유가 제약돼 있고 여성으로서 인권도 제한적인 상황인데, 유목민 소녀가 자아를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보면서 자기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에요.<제레미 오늘도 무사히>라는 작품은 배경이 전쟁이에요. 고등학교 아이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전쟁이 어떻게 모든 것을 파괴하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그런 작품들을 보면 자기가 직접 돌아다니지는 못하지만 여행하는 기분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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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달아줘서 고맙다’는 작가의 손편지에 실려 있던 그림. 김태희 제공.
책 만드는 과정 통해 더 많은 인생 경험… 질리지 않아
Q 출판편집자 일을 올해로 19년째 하고 계십니다. 이 길을 선택한 이유는 뭐였나요?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불문학을 전공했어요. 아르바이트로 어린이책 번역을 하면서 출판사를 왔다 갔다 해본 거죠. 취직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우연히 PC통신에서 편집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본 거예요. 마감이 바로 다음 날인가 그랬는데, 아무 정보도 없이 후다닥 원서를 냈어요. 면접 볼 때 ‘인문서 편집자 할래, 어린이책 편집자 할래?’ 묻더라고요. 아르바이트를 할 때 동화 번역 일이 재미있어서, 어린이책 편집자를 선택했죠. 그때 그런 선택을 안 했으면 어린이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겠죠. 그 경험들이 정말 좋았어요.
Q 잘해도 티가 안 나고 못하면 큰일 나는 게 편집자 일입니다. 이 일의 매력은 뭔가요?
때려치우고 싶은 때도 많죠.(웃음)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게 중요하죠. 3년차 편집자는 산삼과 같은 존재거든요. 저도 그때는 ‘나는 왜 이렇게 편집을 잘할까’ 하고 자만에 빠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사실 다 모르겠어요.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게 편집이더라고요.
편집자가 작가의 원고를 보는 첫 번째 독자라는 점은 늘 설레죠. 편집자의 능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고요. 똑같은 작가의 똑같은 작품이라도 어떤 편집자와 작업을 했는지에 따라 결과물은 다르게 나올 거예요. 그만큼 제가 책 하나 만들 때마다 최선을 다해야 되는 거죠. 책이라는 물질이 하나 나오기까지 프로세스는 같을지라도 그 안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는 그때마다 달라요. 책 속에 들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인생을 책 만드는 과정을 통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질리지가 않아요.
한편으로 굉장히 무섭기도 해요. 내가 책이라는 자식을 딱 낳아서 세상에 내보내야 되는데, 사람들한테 예쁨 받고 잘 자랄지, ‘너 왜 태어났니?’ 하면서 구박을 받을지. 편집자가 큰 실수를 한다면 그 책을 회수할 수 있을지언정, 일단 그 책을 읽어버린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기억을 지워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런 것들에서 오는 엄청난 부담감들이 있죠. 그런 점들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긴장하게 만들어주죠. 물론 보도자료 쓰는 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고 싫지만요.(웃음)
Q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편집자로 일하시면서 들어본 최고의 찬사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거 정말 쑥스러운데, 작가분들이 ‘날개를 달아줘서 고맙다’고 할 때가 가장 기뻐요. 또 ‘함께 울고 웃으며 곁에서 함께 비를 맞아줘’ 고맙다는, ‘책 한 권을 마무리 짓는 이 순간이 이렇게 슬플 수가! 함께했던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이런 내용의 손편지가 제게 큰 힘이 되었어요. 작가와 편집자가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최고의 작업 파트너이자 오랜 친구 관계로 변화하는 것이 결국 편집자에게는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싶어요.
Q 마지막으로, 편집자로서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요?
외주교정자?(웃음) 요즘은 편집자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책 만드는 것 말고도 이벤트, 홍보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저는 첫 원고를 보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교정을 보는 작업이 좋거든요. 전통적인 의미의 편집자 역할은 그런 거였죠. 그런데 지금은 외적으로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드는’ 일만 너무 중요해져버려서……. 저는 기본에 충실한 편집자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