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이었구나. 문득 그날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궁금해져서 핸드폰 달력을 뒤로 넘겨 찾아봤다. 2010년 9월 6일. 벌써 달력 페이지를 서른여섯 번이나 뒤로 넘겨야 찾을 수 있는 날. “잠들지 못하는 시인” 유재건 시인이 영원히 잠든 날이다.
유재건 시인, 아니 재건이 형님과 인연이 시작된 것은 웃지 못할 해프닝과 함께였다. 10년쯤 전, 나는 고향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3학년이 될 때까지 정말 ‘공부 빼고는 다 해본’ 내게 공익근무요원의 삶은 참 낯설고 좀 무료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절 열심히 쓰다가 대학생이 되면서 내팽개친 시를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던 것도 그때. 그 답답하고 꽉 막힌 내 하루하루를 열심히 시로 쓰고, 인터넷 시 동호회에 올린 내 시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위안받는 것이 그즈음의 낙이었다.
그때도 가을이었을 거다. 어떤 사람이 내 시 아래에 댓글로 ‘표절 의혹’을 제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동호회에 올린 시가 ‘하인애’라는 다른 사람이 써서 다른 홈페이지에 올린 시와 똑같다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20대 젊은이를 찾아보기 힘든 시 동호회에서 꽤 부지런히 시를 써올린다고 인정(?)받고 있던 나였는데, 한순간에 ‘어린 놈이 못된 것부터 배웠다’ 소리를 듣게 생긴 거였다.
하지만 그 의혹의 진상은 사실 별 것 없었다. 보통의 인터넷 시 동호회는 홈페이지 안에서 필명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 동호회는 좀 특이하게 실명으로 활동해야 했다. 결국 내가 다른 시 동호회 홈페이지에 필명인 ‘하인애’로 올린 시를 보고 그분이 오해를 하신 거였다. 나는 댓글로 나름 열심히 해명을 했다. 그런데 내 해명이 별로였는지, 그분은 동호회 ‘시삽’한테 내 전화번호를 물어서 직접 전화까지 하셨다.
‘시 도둑질’을 하다 걸렸으면 순순히 사죄하고 납작 엎드릴 일이지 무슨 변명까지 늘어놓는 괘씸한 놈이라 생각했겠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서 격앙된 목소리의 꾸지람을 듣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몇 번이고 해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긴 통화를 끝내면서는 서로 별일이 다 있다고 허허 웃었다. 그분도 오해한 것을 사과하셨고, 나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며 두 사람은 한 순간에 화끈하게(!) 가까워진 것이다.
그분이 바로 시조시인 유재건 시인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나한테 전화까지 걸어 혼을 낼 정도로 ‘한 성질’ 하기로 유명했고, 우리 동호회에서나 문단에서나 비틀어지고 구린 것을 보면 절대 참지 못하는 ‘싸움닭’이기도 했다. 아름답고 곱고 예쁜 말들만 골라서 시를 쓰고, ‘잘 읽었습니다’ ‘건필하세요’ 하나마나한 댓글들만 남기는 것이 보통의 시 동호회였다. 하지만 재건이 형님은 그런 분위기를 가장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신부터 문제적 시를 쓰고, 도전적인 댓글을 남겼다. 활자로든 전화로든 치열하게 논쟁하고 부딪히는 것을 제대로 된 시 쓰기라고 믿었다.
웃지 못할 ‘표절 해프닝’ 이후로 우리는 뭔가 더 각별한 사이가 된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익지도 않은 시로 열심히 ‘투쟁 투쟁’ 외치느라 바빴고, 재건이 형님은 때로는 든든하게 내 편을 들어주고 때로는 따끔한 비판으로 내 고민을 깊게 해줬다. 공익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것이 2006년. 그때는 마침 평택미군기지 확장 문제로 시끌시끌하던 때였다. 학교에 몇 안 되는 ‘복학생 운동권’이었던 나도 나름 부지런히 평택 대추리를 오가며, 그곳에서 채 풀지 못한 결기들을 거의 매일같이 시로 쏟아내고는 했다.
재건이 형님은 이미 시조시인으로 등단을 하신 분이었고, 내게도 당연히 등단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보통은 “너처럼 시 쓰면 등단은 글러먹었다. 전태일문학상 같은 데서나 한번 쳐다봐줄까 모르겠지만” 하는 식으로 끝나는 얘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등단을 목표로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나도 그냥 들을 말만 듣고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재건이 형님은 내가 새로운 시 한 편을 올릴 때마다 참 줄기차게 그런저런 조언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댓글로도 전화로도, 가끔은 만나서 술도 마시고 밥도 먹으면서.
그러다가 정말 진지하게 한마디 남기셨다. 그럼 정말로 전태일문학상에 내보는 건 어떠냐고. 다른 시들은 그냥 냅두고, 대추리에 대한 연작시들만 보내보라고 하셨다. 내가 그럴 그릇이나 되나 싶었다. 더군다나 하루하루 북받치는 감정에 마구 ‘날것’으로 토해내기만 한 그 대추리 연작시만 보내보라니. 하긴 뭐 이러나 저러나 상 받기는 글렀고, 밑져야 본전이니까 시키는 대로 해보자고 응모 마감을 코앞에 두고 시를 보냈다.
내가 시에 관해서 남에게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이력이 그때 만들어졌다. 우수작도 가작도 아니었지만, 추천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연작시 중 세 편이 그해 전태일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리게 된 것이었다. 기뻤다는 말이야 해서 뭐 하겠나. 재건이 형님은 나보다 더 기뻐하면서 동호회에 “최규화 회원, 사고 치다!” 하는 제목으로 글을 올려서 소문을 내주셨다. 물론 그 뒤로 계속 시 공부를 더 하면서 등단에 도전하기를 원했던 형님의 바람은 들어드리지 못했지만, 나한테나 형님한테나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2010년 9월 6일. 재건이 형님의 마지막 인사는 문자 한 통으로 왔다. 그때 형님의 나이 47세. 어느 때부턴가 간이 안 좋으시다는 소문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형님의 갑작스런 이별 통보였다. 형님에겐 처자식이 없었다. 조카라는 이의 번호로 발신된 문자 메시지. 순간 온몸의 세포가 땅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마음도 하얗게 지워지고 세상은 소름 끼치게 적막해졌다.
사람들과 언제 조문을 가자 약속을 하고 빈소로 갔다. 제일 먼저 도착했지만 차마 혼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말 흰 국화로 둘러싸인 액자 속 형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나는 울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날은 담배를 좀 피워도 될 것 같았다. 장례식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가게에서 담배 한 갑, 라이터 하나를 사서 어느 구석에 숨었다. 담배를 한 대 한 대 피우면서 놀라움과 무서움을 조금 덜어냈다.
사람들을 기다려 함께 빈소로 들어섰다. 재건이 형님이 역시나 그 꼬장꼬장한 눈매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영정사진 앞에는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형님의 시집이 놓여 있었다. <햇살이 돌아나가도 동해는 울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형님의 친구들로 보이는 분들이 흐느끼기도 하고 이따금 한숨처럼 형님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 형님의 시집을 일찌감치 저기 놓아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좀 놓였던 것 같다. 우리는 말없이 소주를 마시고, 형님의 얼굴을 보다가 술잔을 보다가, 그렇게 보내드렸다.
3년이 지났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옮겨가는 때가 되면 늘 ‘이맘때였는데...’ 하는 생각만 했다. 벌써 9월 6일이라는 날짜도 가물가물해져서 다시 달력을 넘겨봐야 할 만큼 잊고 살았다. 그 이듬해 봄, 형님의 유작시들과 우리들의 추모시를 모아 작은 문집으로라도 엮은 것이 새삼 다행스럽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문집 <잠들지 못하는 시인>을 펼쳐들었다. 앞표지에 있는 형님 얼굴은 아직 잘 못 보겠다. 얼른 책장을 넘겨 내가 쓴 시를 부끄럽게 다시 읽는다. 지금 이 가까이 어딘가에서, 재건이 형님도 함께 들으시라고.
싸우는 시를 쓰겠다고 해놓고/ 시로 싸우지 않고 말로만 싸운 나/ 내가 지키려 한 것은 내 시였나/ 내 자존심이었나// “맞선보는 처녀처럼/ 조신조신 발 옮겨라”는 시구는 못 보고/ “첫돌 지난 아기처럼” 이리저리/ 부딪히고 넘어지며 “뒤뚱뒤뚱 걸”어왔다// 부인(否認)은 하지 않고/ 시인(是認)만 하는 게 시인(詩人)이라고/ 내 정수리에 뜨거운 화로를 얹어준/ 또 한 명의 싸움꾼// 한 구절 한 구절/ 목숨 조각을 떼어내 시로 내뱉고/ 배 속에 차오르는 복수까지 시인하면서/ 죽을 때까지 시인이었던 그 바보// 내가 시인이 못 된 것은/ ‘잠들지 못하는 시인’의 낯선 침묵을/ 아직도/ 시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난지도 파소도블레>(blog.daum.net/nanpa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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