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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이'가 뭐 어때서!... 행복한 고민이 늘었다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3. 7. 24.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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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이, 승엽이, 단비, 나무, 봄비, 홍삼이, 완봉이, 오름이, 어흥이, 사자, 우람이, 씩씩이…….’


벌써 닷새째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합의점을 못 찾고 있다. 아내는 원래 뭐든 내가 하자는 것을 반대하는 일이 흔치 않은데, 이번만은 생각보다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홈런이’만큼 멋지고 짜릿하고 기쁨에 넘치는 태명이 어디 있다고……! 눈치들 채셨나? 그래, 나 내년에 아빠 된다.


지난주 목요일 밤, 건강검진을 하루 앞두고 우리는 살짝 고민에 빠졌다. 안내문 가운데 ‘여성의 경우 임신 여부를 먼저 확인하고 오라’는 내용이 있었던 거다. 한두 주 전부터 ‘혹시나’ 하는 의심만 갖고 있던 우리는 병원이고 약국이고 모두 문을 닫은 그 시각,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 문진표에 있는 ‘임신 가능성’에 체크를 해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건강검진 병원에 전화로 물어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전화부터 했다. 임신 가능성이 있는데 확인을 못해봤다고, 검진을 못 받는 거냐 물으니 다행히 그렇진 않단다. 대신 X선 검사 등은 임부에게 해가 되니, 위험할 수 있는 검사들은 제외하고 받으면 된다고 했다. 예정대로 출발. 하지만 아침 첫 소변 이후 소변을 참고 오라는 안내문 내용 때문에 출발부터 배뇨기관 쪽이 예민해져 있던 나는 금세 임신 어쩌고 하는 일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침부터 소변을 참고 오라고 했으면 일찍 초음파 검사부터 하고 얼른 ‘해결’을 하게 해줄 일이지, 병원에서는 자꾸 다른 검사만 했다. 전립선 초음파 검사를 하려면 방광에 소변이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이미 찰 대로 차 있는 내 ‘속사정’은 모르고 자꾸 ‘조금만 더 기다려라’, ‘물을 6~7잔 더 마셔라’, ‘왔다 갔다 몸을 더 움직여라’ 하는 소리만 했다.


당장 가서 진상을 부리고 싶었다. 그냥 검사고 나발이고 안 받을란다 하고 시원하게 해결(?)해버리고, 어젯밤부터 ‘금식’한 위장 속에 고기나 실컷 집어넣으러 가고 싶었다. 역시 자궁 초음파 검사를 기다리고 있던 아내는 연신 나를 토닥거리며 진정시키기 바빴다. 사실 자궁 초음파를 하면 아내의 몸 속에 아기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병원에 가는 길에 ‘잠깐’ 하긴 했다. 하지만 김춘수의 시 <꽃을 위한 서시>의 한 토막처럼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아내한테 미안하기 짝이 없다.


막 일어나서 항의 또는 읍소를 하려는 순간, 내 이름이 불리고 나는 검사실로 들어갔다. 현철의 <봉선화 연정> 노랫말처럼 “손 대면 토옥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아랫배를 꾹꾹 눌러대며 검사하는 것도 아슬아슬하게 잘 참았다. 이어서 소변 검사를 ‘시원하게’ 마치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보니, 아내도 검사실로 들어갔는지 대기의자에 보이지 않았다. 치과 검진 받으러 가겠다고 손전화 메시지를 남겨놓고 치과로 갔다.


치과 검진까지 마치고 잠깐 기다리는 사이, 아내가 왔다. 얼굴이 좀 발그레해진 것도 같다. 아내가 먼저 물었다.


“자기, 몸에 뭐 없대?”

“지방간 조금 있대. 술도 끊었는데, 고기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봐.”

“그래? 자기 살 빼야겠다. 난…… 아기가 있대.”


읭? 안 믿었다. 아무래도 장난치는 것 같아서 아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진짜야. 초음파 검사 하는 선생님이, 아기집이 2센티미터 정도 된다고 했어. 심장 소리도 들려주고 싶은데 밖에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못해주겠다고, 축하한다고 해줬어.”


읭읭? 이거 정말인가? 조금씩 놀라려는 순간 아내가 치과 검진을 받으러 들어갔다. 멍하게 앉아 있다가, 검진을 마치고 나온 아내 얼굴을 보니 눈물이 살짝 글썽거리는 것도 같다. 병원 밖으로 나와 점심을 먹을 곳을 찾으면서도 나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아내는 이날 하루 휴가를 냈지만 나는 점심을 먹고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 가까이 사는 장모님께 전화로 말씀드리고 산부인과를 같이 가자고 부탁드리라 했다.


우리 부모님한테도 직접 전화를 하는 게 어떠냐 했더니 눈물 날 것 같아서 못하겠단다. 그래서 내가 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이상 높아졌고, 아버지는 연신 “좋은 일이다” 하시면서 허허허허허 끝도 없이 웃으셨다. 누나들에게도 손전화 메시지로 알렸다. 띵똥 띵똥 축하인사와 조언, 출산 및 육아용품 기증 신청(?)이 밀려들었다. 이거 정말인가……. 나는 그제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아빠가 되는 거구나.


지하철을 한 번, 버스를 한 번 타고 혼자 회사로 왔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었는지 속이 다 상할 지경이다. 벌써 점심 때도 훨씬 지났고, 그냥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병원을 같이 갔어야 했다. 한 달 전 어깨 수술을 하고 마침 그날 퇴원하신 장모님이 같이 가주셔서 정말 다행이었지만, 뭐 그렇게 중차대한 일을 한다고 사태 파악도 못하고 덜렁 회사로 와버린 내가 지금에서야 너무 못나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매일 오가는 출근길이 그렇게 아름다운 적은 처음이었다. 아마 군대 전역(정확히는 소집해제) 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 그랬을 거다. 보이는 사람들 모두 웃고 있는 것 같고, 부릉거리는 버스 소리도 무슨 악기 소리처럼 신이 났다. 결국 흥에 못 이겨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서 회사 사람들에게 돌렸다. 그때는 딱히 오늘 ‘선언’을 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냥 이 좋은 기분을 이렇게라도 분출(?)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일을 하는데도 웃음이 실실 새나왔다. 동료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방긋’ 웃게 되고, 심각하고 진지한 기사(그날은 태안 해병대캠프 사고 다음 날이었다ㅠ.ㅠ)들을 편집하면서도 도무지 몰입(?)이 안 됐다. 결국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같은 부서 사람들에게 자진해서 ‘자랑’을 했다. 축하 인사를 들으며 또 헤벌쭉. 내내 기분이 머리 위로 두어 뼘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 안에서 보는 남자 선배들의 모습이 달리 보였다. 저기는 아들 하나, 저기는 딸 둘, 저기는 딸 하나, 저기는 아들 둘……. 다 ‘아빠’들. 저 선배들도 내 오늘 같은 날들을 다 겪었겠지. 이런 날들을 차근차근 겪고 나서 다 아빠가 되고 어른이 된 거겠지. 사실 그렇게 학수고대 기다려온 것이 아닌데도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오랜 시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아이를 얻은 사람들은 얼마나 더 기쁠까.


퇴근을 하고 처가로 갔다. 마침 장모님이 한 달 만에 퇴원하신 날이기도 하니 우리들만의 잔치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아내가 산부인과에서 찍은 초음파 사진을 보여줬다. 크기도 모양도 꼭 콩알만 했다. 아기는 1.56센티미터. 벌써 7~8주 전부터 아내의 몸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한다. 장모님은 다음에는 꼭 병원 같이 가라고, 가서 심장 소리 들으면 눈물 날 거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 부모님도 두 분이서 저녁을 드시면서 잔치를 벌이셨다 했다. 아버지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새아기’한테 직접 축하전화를 하셨다. 자랑을 잘 할 줄 모르시는 장모님도 그새 여기저기 자랑을 하셔서 친지들한테서 축하전화가 계속 걸려왔고, 누나들은 벌써부터 나한테 ‘올케 잘 챙겨주라’고 축하인지 협박(?)인지를 하느라 야단이었다. 아기가 생겼다는 것 자체로도 정말 기뻤고, 이 소식만으로 우리 가족들을 이렇게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더더욱 기뻤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 부부에게는 숙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태명’. 옛날에는, 임신하자마자 태명 짓고 누구야 누구야 하는 걸 참 유난 떤다 생각했는데, 이게 또 그렇게 삐딱하게 보기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모든 관계는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나. 우리 가족에게 이렇게 기쁨을 선물해준 아기를 그냥 일반명사 ‘아기’라고 부르는 것도 좀 서운한 짓이다. 무엇보다 “빨리 태명 지어. 이제 누구 엄마, 누구 아빠 이렇게 불러야지” 하고 들떠 계신 장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빨리 태명을 지어야 한다.


공부는 잘하든 못하든 야구는 좀 잘했으면 좋겠으니까 ‘홈런이’, 엄마가 꿨다는 태몽에 사자가 나타났다니까 ‘어흥이’, 아내 별명이 나무고 내년이 갑오년 ‘나무 목’ 든 해니까 ‘나무’, 엄마가 해준 홍삼즙을 열심히 먹고 만든(?) 아기니까 ‘홍삼이’ 등 여러 후보들이 각각 나름의 이유들을 가지고 각축을 벌이고 있다. 며칠째 이 생각만 하는데 아무래도 너무 어렵다. 가족 투표에라도 부쳐야 하나. 행복한 고민이 늘었다.



* <난지도 파소도블레>(blog.daum.net/nanpa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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