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거리는 무궁화호 밤기차. ‘칼퇴근’ 하자마자 고향으로 가고 있다. 내일은 엄마의 수술 날. 엄마는 뭐하러 “길에 돈 내삐려가며”(엄마는 ‘차비 쓴다’는 표현을 꼭 이렇게 한다) 왔다 갔다 고생하냐고 말렸지만 나는 하루 휴가를 내고 엄마한테 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휴가도 많이 남아서 연말이면 억지로(?) 무더기 휴가를 써야 할 판인데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 하더라도 명색이 ‘암수술’ 아닌가.
엄마의 몸에 암이, 아니 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기분 나쁜 뭔가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두 달 전이었다. 회사에서 주최하는 축구대회가 있어서 아침부터 기분 좋게 땀 흘린 토요일.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와 시원하게 씻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손전화 메신저가 띠롱띠롱 울었다. 작은누나가 보낸 메시지. 엄마가 건강검진을 했는데 암이 의심된다고 빨리 큰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들었다며, 다음주에 대학병원에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담담하게 사실만 전하는 메시지였지만 그 말을 듣고 담담할 수 있는 자식이 어디 있을까. 바로 작은누나한테 전화를 했다. 역시, 대판 운 모양인지 아직도 목소리가 잠겼다. 메시지로 보내준 내용을 다시 자세히 확인하고 내가 병원에 같이 가볼 테니까 걱정 말라고 작은누나를 달랬다. 모두 객지에 나가 사는 우리 삼남매. 엄마는 우리가 괜히 힘들게 엄마한테 와보겠다고 할까봐 말도 안 하려고 했다 들었다. 특히 나한테는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도 전해 들었지만, 나는 그걸 모른 척하는 게 말이 되냐고 일축했다.
다음주 화요일이던가, 그날도 하루 휴가를 내고 그 전날 밤에 고향으로 갔다. 그날은 다행히 아내도 휴가를 낼 수 있어서 함께 갈 수 있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주말에 먼저 통화를 했다. 둘 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 미리 걱정할 필요 있냐고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안 좋은 생각들이 자꾸 떠오르는 건 피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밤중에 고향집에 도착한 우리 부부를 엄마는 평소와 다름없이 맞아줬다.
우리는 엄마를 위로하고 엄마는 우리를 위로했다. 나는 그 사이 인터넷으로 알아본 얘기들을 엄마한테 해주면서 자각증상 없이 건강검진으로 발견한 거니까 간단히(?)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했고, 엄마는 누구 엄마도 암이었는데 병원 좀 다니더니 잘만 살더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다음 날 병원. 일단 진료실에는 엄마 혼자 들어갔고 우리는 계속 기다리기만 했다. 속으로는 제발 보호자 들어오라는 소리는 하지 않기만 바라면서. 왜 병원 드라마를 보면, 보호자만 불러서 얘기할 때는 주로 안 좋은 얘기 아닌가.
진료실 문이 빼꼼 열리더니 엄마가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본다. 쑥스럽게 웃더니 손짓을 해 들어오라고 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엄마도 그때 ‘보호자 들어오라 해라’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몰랐단다. 혹시나 뭔가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되는 얘기를 해줄까봐. 하지만 내 눈에 일흔은 족히 돼 보이는 할아버지 의사는, 그냥 엄마가 말을 잘 못 알아들을까봐 젊은 사람들을 부른 거라고 안심시켰다.
“이거는 아직 암도 아이고 아무것도 아이라. 전암 단계가 있고 0기, 1기, 2기, 3기, 4기 요래 가는데, 나중에 살을 확실히 띠보면 알겠지만 이거는 있어봤자 요서 요 어데(전암에서 1기 사이) 있는 기라. 카니까 전혀 걱정할 필요는 없고, 일단 수술은 쪼매난 거 하나 간단하이 받아야 될 끼라.”
왜 환자들이 의사들한테 때로는 하느님처럼 붙들고 매달리는지 아주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내시경으로 들여다봤지만 암이 어디에 얼마나 크게 있는지는 찾지 못한 모양이어서, 수술과 검사를 겸한 ‘절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엄마가 얼마나 아픈 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달라진 바 없었다. 하지만 ‘아직 암이 아니거나, 나빠도 초기일 것’이라는 말에 며칠간의 긴장이 다 녹아내렸다.
의사는 대학병원 부설 암센터의 다른 의사를 소개해주며 수술은 거기서 받게 될 거라 말해줬다. 그리고 암센터로 가기 전에 다시 한번 이곳으로 와서, 오늘 긁어낸 상피조직을 검사한 결과를 듣고 가라고 했다. 엄마의 표정도 한결 밝아져 있었다. 멀쩡하던 사람도 병원에서 암 소리를 들으면, 몇 달 못 가 잘못되기도 하지 않나.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다. 감기가 안 떨어져서 병원에 가셨는데, 다음 날로 폐암 선고를 받고 바로 돌아가셨다. 엄마도 아마 그 기억을 떨쳐버리진 못했을 거다.
누나들에게 전화로 소식을 알리고 아버지께도 알려드렸다. 엄마, 아버지와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한결 누그러진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엄마는 “암이라 카니까 느그 아빠도 방에 엎드려서 울더라” 하는 얘기를 아버지 앞에서 천진하게 우리한테 일렀(?)고, 나와 아내는 이미 다 지난 얘기인 것 마냥 같이 웃으며 들었다. 앞으로 엄마는 분명 힘들게 병원을 오가며 고생을 해야겠지만, ‘죽음’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그런 여유를 줬다.
3주 정도 지나 다시 휴가를 내고 고향에 갔다. 병원에 가는 날은 화요일이었는데, 월요일도 휴가를 내서 주말부터 내려가 나도 푹 쉬었다. 그 사이 엄마한테는 암 치료에 좋다는 ‘건강 식단’ 요리책을 선물했고, 나도 암에 대한 책을 사서 공부했다. 엄마와 병원에 가는 날. 엄마는 그 사이 병원에 한 번 더 와서 그런지 처음보다 덜 긴장하는 것 같았다. 공간 자체가 좀 익숙해진 탓도 커 보였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내가 진료실에 함께 들어갔다. 어차피 결과 듣고 수술 날짜만 잡으면 되는 것. 나도 별로 긴장은 안 했다.
진료실을 나오며, 처음 왔을 때처럼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확실한 건 그 수술을 해봐야 안다”는 소리야 당연히 예상한 거였지만, “일단 암이 맞기는 한 것 같네요”라는 소리는 예상 못한 것이었다. 사실 예상을 못했다기보다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는 게 정확하겠다. 이러나저러나 수술은 한번 해야 하는 거라면, 기왕이면 “아직 암은 아닌 것 같고요”라는 말을 말머리에 듣고 싶었던 거다.
아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엄마가 먼저 “머 아예 안 좋다 카는 소리가 아이고 예상했던 그 중에서 인자 쪼매 안 좋다 그 말이지 머” 하고 ‘쿨하게’ 얘기했다. 그 말이 맞았다. 전에 의사가 한 말이 ‘말기는 아니고, 전암 단계이거나 초기 암’이라는 거였으니. 맨 처음 건강검진센터에서 암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는 걱정해야 할 건 훨씬 줄었고, 구체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건 훨씬 늘어난 것 아닌가. ‘암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좋았겠지만, 그 말을 못 들었다고 해도 ‘조금 덜 좋은 것’이지 ‘아주 나쁜 것’은 아니지 않나.
내가 그렇게 엄마를 달랬어야 하는데, 엄마가 먼저 담담하게 생각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전날 밤에 엄마가 저녁상 앞에서 한 얘기가 생각났다.
“느그 누나들 보면 내가 죽는다 캐도 안 억울한데, 니를 보면 쫌 억울하더라꼬. 누나들은 시집 다 가고 아들 낳고 재미나게 사는 거 다 봤으니까 머 괜찮은데, 니는 이제 결혼해가 아직 아 낳는 것도 보고 재미나게 사는 것도 쪼매 더 봤으면 싶은데.”
내색은 잘 안 했지만 엄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화를 내면 더 이상할 것 같아서 “아이고 드라마 쫌 작작 봐라. 비련의 여주인공 나셨네” 하고 웃으며 핀잔이나 주고 말았다. 나도 그동안 문득 ‘왜 하필 우리 엄마한테, 평생 고생만 하고 이제 자식들 덕 좀 보고 편하게 살 일만 남은 우리 엄마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 하고 막 원통한 마음이 들 때도 많았다. 그때마다 ‘오버 하지 말자’고 스스로 야단도 치면서 아슬아슬 버텨가고 있는 거였다.
죽느니 어쩌느니 할 때는 언제고, 엄마는 일손 바쁜 양파 철이 끝나면 수술을 하겠다고 수술 날짜를 한 달 뒤로 잡았다. 그게 바로 내일. 며칠 전 아버지는 어디어디서 못 받고 있던 돈을 쫙 수금해서 현찰 100만 원을 엄마한테 줬단다. 반지를 사든 옷을 사든 마음대로 쓰고 놀라고. 엄마는 그 돈으로 팔찌를 하겠다고 전화로 자랑을 했고, 성당 나가서 친구 사귀는 것도 아버지가 허락해줬다고 신나했다. 이걸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나도 엄마한테 노래교실도 등록하고 일요일엔 등산도 가고 놀라고 맞장구를 쳐줬다.
지금은 내일 수술이 잘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밖에 없다. 하루 만에 입원하고 수술하고 퇴원하는 수술.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고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이 수술이 잘못될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 수술이 끝이 되지 못하고 기나긴 ‘엄마의 싸움’의 시작이 될까봐 걱정하는 거다. 그리고 그 과정을 내가 얼마나 엄마 곁에서 지켜볼 수 있을까 하는 못난 마음도 분명 있을 것이고.
지금 시각, 밤 10시. 기차에서 잠을 안 자고 글을 쓰기로 한 건 아무래도 잘한 일 같다. 기차에서 잠까지 잤다면 오늘 밤에는 정말 잠이 안 오겠지. 덜컹덜컹 무궁화호 기차는 씩씩하게도 달린다.
* <난지도 파소도블레>(blog.daum.net/nanpa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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