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가도 모르는 게 여자의 마음, 아니 남북관계다. 3월만 해도 금방 전쟁이 날 것처럼 난리를 치다가, 6월 6일 장관급 회담 합의로 갑자기 훈풍이 불다가, 또 11일 회담 무산으로 금세 냉랭한 바람이 불게 됐다. 또 언제 분위기가 회까닥 뒤집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이 벌써 13일. 다른 건 몰라도 6·15 남북공동행사가 물 건너간 것만큼은 확실해보인다. 2009년부터 공동행사를 못했으니 벌써 5년째인가. 6년 만에 ‘그날’의 감동을 간접적으로나마 맛보려했던 내 바람도 씁쓸하게 무너졌음을 인정해야 할 때다.
2007년 6월 14일 아침,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이명박 정권 이후부터 신문을 보기 시작한 세대들은 좀 놀라겠지만, 우리 ‘가카’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한 해에만 남측 사람이 10만 명 넘게 북측 땅을 밟던 시절도 있었느니라. 이름 하여 ‘6·15민족통일대축전 남측대표단’. 평양에서 열린 그해 6·15공동선언 기념 남북공동행사에는 남과 북에서 각 300명, 해외에서 15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남측대표단 300명 가운데 학생 대표가 3명 있었는데, 믿기 어렵겠지만,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나였다.
내가 뭐라고 거길 다 갔을까. 솔직히 재수가 좀 좋았을 뿐이다. 3명의 학생 대표는 한총련, 한대련,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에서 한 명씩 뽑기로 했다. 나는 그때 26살의 나이로, 우리 학교의 민주노동당 학생위원장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전국 학생위원장이 가야 했으나 중요한 당 일정 때문에 패스, 바통을 이어받은 서울시 학생위원장은 군대 문제가 꼬여 있어서 패스, 그리고 여차저차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 나였다. 개인 참가비가 꽤 됐으나 내가 절반, 학교의 다른 ‘동지’들이 절반을 부담해줘서 최종적으로 내가 가게 됐다.
여행 한번 제대로 가본 적 없는 촌놈. 그날 비행기를 처음 탔다. ‘실물’ 비행기를 본 것도 그날이 처음. 안 그래도 떨릴 텐데 그걸 타고 ‘평양’을 간다니 정말 떨려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빨갱이들, 가서 돌아오지 말라’는 반북단체 어르신들의 황송한 배웅을 받으며 국제선 아시아나 전세기를 타고 떠났다. 그리고 한 시간 만에 평양의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뉴스로만 보던 그 화면!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떡하니 걸린 공항 청사!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상태로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면서, 창밖으로 시내를 구경하기 바빴다.
제일 놀란 것은 건물이 엄청 크다는 점이었다. 서울은 좁고 높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평양의 건물들은 높지 않은 반면 넓이가 엄청 넓고 또 널찍널찍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거리에 그늘이 별로 없었다. 평양은 분명히 서울보다 북쪽에 있는데, 땡볕이 그대로 내리쬐니 서울보다 더 더운 것 같기도 했다. 거리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어린 학생들은 이따금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기도 했다. 원래 길거리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했지만, 나는 차 안의 안내원 몰래 디지털카메라로 동영상도 찍었다.
남북공동행사 하러 평양으로!... 시작은 좋았지
숙소는 양각도호텔. 텔레비전에서는 북측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역시 남이나 북이나 여배우는 예뻤다. 남측 방송의 CF 대신 엄청 건전한 노랫말(‘조국에 충성을 다하자’, ‘훌륭한 학생이 되자’ 하는 식)의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북측 방송을 신기하게 보고 놀다가 오후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나흘간의 공동행사 개막을 알리는 개막식을 대성산 남문에서 열었고, 만수대예술단 공연관람, 인민문화궁전에서 한 환영연회까지 무사히 마쳤다. 물론 모든 일정은 남·북·해외의 대표단이 함께했다.
숙소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웠지만, 잠이 잘 올 리가 없었다. 내가 하루 동안 누구를 만난 건가, 대체 어떤 일들을 겪은 건가, 어안이 벙벙했다. 눈물이 막 나고 그런 정도는 아니었지만, 개막식에서 평양 시민들과 악수를 하며 가슴이 막 쿵쾅거리는 감동도 느꼈고, 환영연회에서 만난 일본 조선학교 출신 해외측대표단 대학생의 감격에 찬 표정에서 왠지 모를 미안함과 뭉클함을 느끼기도 했다. 가슴 속에 뭔가 뻑적지근한 것이 가득 차는 걸 가까스로 달래면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꿈에도 생각 못한 채.
다음 날은 바로 6월 15일. 오전에는 전체 일정의 ‘메인이벤트’라 볼 수 있는 민족단합대회가 예정돼 있었다. 장소는 인민문화궁전. 우리로 치면 세종문화회관쯤 될까, 그 넓은 강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대회 시작을 기다리는데, 이거 뭔가 분위기가 심상찮다. 자꾸만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야외로 나가 ‘편하게’ 기다리라고 했다. 까닭을 알고 보니, 한나라당 의원들이 주석단(행사 단상 위의 귀빈석쯤 되겠다)에 앉는 문제 때문에 남측대표단과 북측대표단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 것이었다.
당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밝혔듯이, 그들은 한나라당을 ‘대표’해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행사 전 북측은 그들의 참석을 원칙적으로 거부한다는 의사를 남측에 거듭 밝혔고, 그들은 ‘개인자격’으로 축전에 참가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평양까지 오게 됐다. 그리고 북측은 그들이 포함된 주석단 명단에 사전에 합의했는데, 행사 직전 합의를 번복하고 그들을 막아선 것이었다.
남측대표단 안에서도 행사연기의 책임을 북측의 번복에 두려는 입장과 한나라당 의원들의 무리한 요구에 두려는 입장이 부딪치면서, 남측위원회는 조직와해라는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행사는 계속 미뤄지고, 그날 예정된 대동강유람선 등 참관행사는 아예 취소됐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 일 때문에 결국 북측위원회 지도부는 총사퇴를 했고, 남측위원회 또한 한동안 내홍을 피할 수 없었다 한다.
어쨌거나 그때 우리는 인민문화궁전 마당에서 그늘을 찾아다니며 ‘방황’했다. 이따금 상황의 변화가 있으면 ‘분임토의’ 같은 걸 해서 의견을 새로 올리기도 하면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말도 걸고 우리끼리 사진도 찍고, 점심 대신 나온 빵도 먹으며 놀다가 남측대표단의 버스를 운전하는 북측 기사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됐다. 가족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을 하다가 ‘작금의 사태’ 얘기에 그분이 딱 한마디 하셨다.
“여기도, 남조선으로 치면 ‘국민정서’라는 게 있습니다. 인민들이 텔레비전으로 다 볼 텐데, 만날 ‘전쟁하자’ 하던 사람들이 주석단에 앉아 있으면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만날 미국 편 들던 사람들인데 그걸 그냥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 인민의 정서에서는. 이런 얘기 내가 길게 해선 안 되겠지만…….”
'격' 따지는 것만큼이나 '서로의 입장'을 헤아리기를
지금 생각하면 참 뻔한 말인데, 그때는 엄청 머리를 띵 하고 울린 말이었다. ‘여기도 국민정서가 있다’는 말. 당연했다. 남쪽에 있는 것은 북쪽에도 있다. 남쪽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북쪽 사람들도 생각한다. 솔직히 기다림이 한나절을 넘어가면서부터, ‘북측은 합의까지 해놓고 왜 이러나. 그냥 잠깐 앉혀주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한 북측 인사가 서울에서 열린 행사의 귀빈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전국에 방송된다고 생각해보니, 그 말도 분명 이해가 됐다.
결국 민족단합대회는 일정의 마지막 날인 17일 오전, 평양을 떠나기 직전에야 열렸다. 한나라당 의원들을 포함한 모든 종단, 사회단체, 정당대표 등을 주석단에서 빼는 것으로 합의된 것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그것도 마음에 안 든다고 행사 자체를 불참해버렸다. 그동안 15일과 16일에 예정된 행사는 반만 열렸다. 중간에 한나라당 의원들은 먼저 귀국하겠다고 중국을 경유하는 비행기편을 알아보기도 했다 하고. 당연히 폐막식과 답례연회는 취소됐고 일부 참관일정들도 역시 취소. 우리는 양각도호텔만 구석구석 실컷 구경했다.
그날의 아쉬움 때문일까, 돌아오는 고려항공(북측 항공사다. '레어 아이템'인 이 비행기 '자리표'를 지금도 소장 중) 비행기 안에서 다짐했다. 이 다음에 신혼여행을 꼭 평양으로 오겠다고. 하지만 이듬해인 2008년에 금강산관광이 중단되고 2009년부터는 남북공동행사도 열리지 못했다. 평양관광 길이 열릴 때만 기다렸다가는 신혼여행과 환갑여행을 겸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나는 안타깝게도 그날의 다짐을 저버리고 지난해에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은 필리핀 세부로 가고 말았다.
앞으로 5년 안에 내가 평양에 다시 갈 날이 올까. 남북공동행사라도 열리면 어찌어찌 취재단에라도 껴들어가볼 궁리를 할 텐데, 이것 참 앞길이 흙탕물 같다. 이번 회담은 대표의 ‘격’ 때문에 시비가 붙어서 산통 깨졌다나. ‘국격’이니 뭐니 할 때부터 ‘격’ 참 좋아하는 거야 알았지만, 이번처럼 극적으로 만들어진 기회마저 이런 격 저런 격 찾느라 날려먹다니 한숨만 푹푹 나온다. 안 되는 것도 이해하고 설득하면서 되게 해야 할 판국에, 그러고도 ‘우리가 아니고 쟤네가 깨먹은 건데요’ 하는 꼴은 한심하다 못해 유치하다.
이 글을 쓰느라 당시 통일부가 발급한 ‘방문증명서’를 오랜만에 꺼내봤다. 아내가 그걸 보더니 “빨갱이라고 잡혀가면 자기 이 사진 나오겠네” 한다. 6년 전 묵은 양각도호텔에서 아내와 함께 다시 묵으며, “내가 평양에 와봐서 아는데……” 하고 너스레도 좀 떨어볼 날이 10년 안에만 왔으면 좋겠다. 그때는 국제선이 아니라 국내선을 타고 간다면 더 감개무량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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