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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술안사', 내 얘기 한번 들어볼래?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3. 5. 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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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년 하고도 한 달이 지났다. 내가 ‘술안사’로 살아온 지. ‘술 안 사는 사람’이라고 오해들 하지 마라. ‘술안사’는 ‘술 안 마시는 사람’이란 뜻이다. 지난해 3월 마지막 날, 갑작스레 잠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나의 ‘술안사’ 인생은 시작되었다. 사흘 입원해서 간단한(이라고 썼지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는 않은) 수술 하나를 받고, 넉넉잡아 한 달 정도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은 뒤부터였다.


퇴원은 사흘 만에 했지만 후속조치(?)는 생각보다 길고 짜증스러웠다. 1주일은 병가를 내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고 그 다음 1주일은 재택근무를 신청해 방바닥에 엎드려서 노트북으로 일했다. 어딜 가든 거즈와 약을 챙겨 다니는 것도 귀찮았고,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수술부위를 하루에도 몇 번씩 씻어야 하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의사가 술을 마시라고 했어도 마실 수 없는 상황. 금주는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번거로운 후속조치와 통원 치료 역시 마무리될 무렵,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한 달 사이에 몸무게가 3킬로그램이나 빠진 것이다. 보신해야 된다고 고단백 식단으로 세끼 밥을 꼬박 챙겨 먹었는데도! 격렬한 운동은 하지 말라는 소리에, 두어 달 해온 킥복싱도 안 하고 집에 거의 누워 있기만 했는데도! 이유는 바로 술이었다. 단지 술(그리고 안주)을 마시지 않은 것만으로, 사라졌던 턱선이 살아나고 허리띠 구멍이 하나 줄어든 것이다. 그때 결심했다. 나는 ‘술안사’가 되겠노라고.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안 하던 짓을 하는 것도 힘들지만 하던 짓을 안 하는 것도 참 힘들다. 더군다나 이제 ‘아파서 못 마신다’ 할 상태도 아니지 않은가. 지난 10여 년 동안 밥처럼 마셔온 술을, 100만 원 월급 받으면 50만 원은 꼬박꼬박 술 사 마시던 착실한 ‘알코올 푸어’였던 내가 하루아침에 끊을 수 있으리라고는 나 역시 생각 못했다. 하지만 눈으로 확인한 다이어트의 위력, 그리고 이 새파란 나이에 수술대에 오르기까지 그놈의 술이 단단히 한몫했을 거라는 의심은 내 의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물론 술을 독약 보듯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입에도 안 대는 것은 아니다. 내 금주에도 예외 규정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모님, 장인·장모님 등 집안 어른이 주시면 마신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예외 규정도 없었다면 내가 그 길고 긴 금욕(?)의 세월을 버텨오지도 못했을 뿐더러, 어른들과 식사 자리에 함께할 때마다 내가 왜 술을 안 마시는지 구구절절 설득하기 위해 별 궁상을 다 떨어야 했을 거다.


술을 마실 줄 알면서,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보약을 먹는 것도 아닌 30대 신체 건장한 남성이 술자리에서 술을 마다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술자리를 무조건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술자리가 예상되는 날이면 술자리에는 있으되 술잔은 받지 않기 위한 논리를 연구하느라 늘 머리가 아팠다.


“자, 한 잔 받아.”

“아, 죄송합니다. 저는 술을 안 합니다.”

“오, 그래? 알겠어.”


이렇게 처음부터 나도 솔직하게 ‘마시기 싫다’고 이야기하고 상대도 ‘쿨하게’ 받아들이며 끝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보통은 “저는 술을 안 합니다”라는 말 뒤로 당연히 “왜?”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그럴 때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술자리의 성격과 질문자의 성향(사실은 ‘성질’), 조력자의 동석 여부 등을 복합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몇 가지 항목의 객관식 대답들을 떠올린다. 여기서는 몇 번이 좋을까?


1. “마시기 싫어서 안 마십니다.” : 돌직구 스타일. 따라오는 질문들을 잘라버릴 수 있지만, 상대에 따라 버릇없다고 야단을 맞거나 술자리를 ‘싸~’ 하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


2. “사실은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얼마 전에 수술을 좀 하고…….” : 중환자 스타일. 술잔을 가장 확실하게 피할 수 있는 대답이지만, 너무 설명이 길고 그 설명을 다 하고 나면 나는 완전 중병에 걸린 ‘상약골’이 돼 있다는 단점이 있다(그러니 집안 어른들에게는 절대 해선 안 됨!). “젊은 사람이 건강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또는 “나도 예전에 거기가 안 좋았는데” 하고 시작되는 훈화 말씀은 덤.


3. “요즘 한약 먹습니다.” : 허준 스타일. 과거에는 꽤 유용한 방법이었다고 하지만 “누구는 한약 안 먹냐. 술 잘 마시라고 먹는 게 한약이야” 하는 사람들이 술자리마다 꼭 한 명씩 있다는 게 함정. “의사가 마시지 말래요” 등의 유사 답변에도 꼭 “의사는 원래 술담배 하지 말라는 게 레퍼토리야”라는 답변이 돌아오므로 하나마나한 얘기가 되기 십상이다.


4. “한번 끊었더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한 달에 몸무게가…….” : 헬스관장 스타일. 진실에 가장 가까운 대답이지만 ‘중환자 스타일’보다도 설명시간이 길고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확실한 이유가 없다. 보통은 “오늘만 마셔”, “세 잔까지는 괜찮아”, “오늘 같은 날이 또 있겠냐” 등의 답변이 돌아오거나, 다이어트와 사회생활에 대한 일장연설이 돌아올 수 있으므로 미리 대처방법을 준비해둬야 한다.


5. “오늘 차를 가져와서요.” : 음주단속 스타일. 얼핏 보면 아주 확실한 방법 같지만, “대리운전비 줄게”라는 한마디로 ‘게임오버’ 될 수 있다. 동석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봐가며 써야 할 방법. 사실 차도 안 가져 와놓고 거짓말 했다가 걸리면 욕도 먹고 술도 먹게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음.


이렇게 글로 정리해놓고 나니 더 궁상맞아 보인다. 그냥 “마셔”-“싫어요”-“응”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걸까. 머릿속으로 저런 작전들을 궁리하며 1년 1개월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다. 가까운 사람들의 머릿속에 “최규화는 ‘술안사’야” 하는 인식이 박히고 나니 말이다. 잘 모르는 사람이 술을 권할 때 옆에서 “쟤는 술 안 마셔요. 저부터 한잔 주세요” 하고 거들어줄 때면, 정말 그 사람이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나한테 술을 주려다가 말고 “아, 넌 안 마시지? 사이다 시켜줄까?”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1년 1개월 전의 나를 무참히 돌아보게 된다. 술자리에서 누구 술 먹이는 일을 보람으로 삼던 내 모습 말이다. 그게 친해지는 거라 생각했고, 그렇게라도 술을 일단 마시면 나중에는 다 즐거울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나. 그게 상대방한테는 고문이 된다는 것도 모르고.


사실 애초에 나를 ‘술안사’의 길로 이끈 다이어트 효과는 결혼과 함께 말끔히 사라졌다. 아침-점심-간식-저녁-야식을 살뜰히 챙겨주시는 아내님과 그것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줄기차게 무상급식해주시는 장모님 덕분에 내 몸무게는 ‘인생 최고기록’을 매일 경신하고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왕 뚱보가 된 것 술도 다시 마셔버리자는 생각은 들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술 없는 삶’을 통해 새 인생에 눈을 떴기 때문인지, 술만 안 마신다면 언제든 ‘날씬이’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착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 <난지도 파소도블레>(blog.daum.net/nanpa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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