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그래서 보고 싶은 프로그램만 인터넷으로 찾아 본다. 내가 거의 빼놓지 않고 찾아보는 프로그램들은 주로 <무한도전>이나 <개그콘서트> 같은 예능프로그램. 그냥 웃기니까 볼 뿐이지만 가끔 생각지도 못한 화두를 던져주기도 한다. 6월이었나, <개그콘서트>의 ‘오성과 한음’이란 코너를 보고 있었다. 청년 백수인 ‘오성’과 ‘한음’의 대화 한 토막이 머릿속에 팍 꽂혔다.
“한음아, 넌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냐?”
“난 거위.”
“왜?”
“꿈이 있잖아.”
아. 꿈(이들의 대화가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의 노랫말을 생각해보라). 꿈이라는 것, 나한테도 그런 것 있었다. 그럼 지금은 없나? 글쎄, 없는 것 같진 않은데 대답하자면 한참을 거르고 더듬고 주저하게 된다. 비록 객관적인 ‘삶의 질’이야 내가 오성이나 한음보다 한참 나아 보이지만, 그들의 대화에 내 가슴이 잠깐 짜르르 떨렸던 건 내게도 그들에게처럼 ‘꿈의 결핍’이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내 인생 최초의 꿈은 대통령이었다.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 그건 순전히 이름 때문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내 이름을 소개하고 나면 몇 마디 꼭 덧붙여야 하는 말이 있다.
“최규화라고 합니다. 대통령 최규하 말고 최규화요. ‘화이팅’ 할 때 화.”
어릴 때도 어른들한테 내 이름을 말하고 나면 꼭 ‘전직 대통령’과 관계를 짓는 말이 돌아오곤 했나 보다. 그럴 때 내가 “저도 대통령 될 꺼예요” 하고 말하곤 했다는데, 그건 아무래도 이름부터 남과 비교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반항심이나 오기 같은 것 아니었을까. 어쨌든 여기까진 엄마의 기억.
내가 기억하는 내 첫 번째 꿈은 소방관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였던 것 같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불길에 뛰어드는 모습이나, 얼굴에 묻은 검댕을 슥슥 닦아내면서 ‘뭐 이 정도야’ 하는 표정으로 씨익 웃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을까. 엄마는 내가 그때부터 남을 위해 일하는 희생정신이 투철했다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건 그냥 엄마들의 흔한 ‘우리 아들 천재론’쯤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축구선수’나 ‘과학자’ 같은 수준의 꿈일 뿐이었다. 다만 내 스스로도 조금 기특하게 생각하는 건 ‘대통령’처럼 뜬구름 잡는 수준도 아니고 ‘회사원’처럼 너무 현실적이지도 않은, 적절히 영웅적이면서도 현실성도 낮지 않은(소방공무원 시험은 대통령 선거나 월드컵대표 선발보다는 쉽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꿈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꿈은 중학생도 되기 전에 잊히게 된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6학년 때인가, 처음으로 직업 적성검사라는 걸 했다. 적성검사 결과지에 내가 생전 들어본 적 없는 꽤 여러 가지 직업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중 눈에 들어온 것이 ‘도시계획과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이라는 말만 보고 내가 어릴 때부터 ‘철밥통’을 바랐다고 오해하지 마라. 그때는 뭔가 지역사회를 설계하고 균형적인 도시의 발전을 계획하는 ‘도시 디자이너’스러운 설명이 그 옆에 달려 있었으니까.
중학생이 된 뒤에도 그 꿈이 유지됐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중학생 시절은 내게 뭔가 ‘사라진 시절’ 같다. 우연히 시작한 문예반 활동을 통해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뭔가를 늘 생각하느라 마음만 바쁘게 살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는 도통 기억이 안 난다. 그런 중학생 시절이 끝나갈 무렵. IMF가 터졌다. 여기저기서 회사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인생도 막 망해간다는 얘기만 들렸다.
그때 생긴 꿈이 ‘부자’였다. 구체적으로는 ‘착한 부자 사장님’. 회사에 취직하기도 어려운 판에 무슨 수로 사장까지 되겠다는 건지, 그리고 착하기만 해서 어떻게 부자가 되겠다는 건지 캐묻지는 마라. 그땐 그랬다는 거다. 그때는 회사를 말아먹고 직원들을 줄줄이 잘라내고서는, 자기는 휠체어 타고 아픈 척하거나 뻔뻔하게 해외로 내빼는 사장님들이 뉴스에 참 많이 나왔다(지금은 그런 사장들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은 그런 사장들이 뉴스에만 나오지 않는다는 게 함정). 아마 그래서 그런 애매모호한 꿈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본격적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기 시작하면서 그 꿈도 금세 지워졌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른들한테 ‘개기기’ 시작했고, ‘꿈 = 장래희망’이라는 등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시를 쓰면서 당연히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은 생겼으나, 그건 장래희망이 아니었다. 아무리 순진무구한 문학소년이라도 시를 써서 먹고살 수는 없는 세상이란 것쯤은 안다. 그래서 생각한 장래희망이 기자. 어쨌든 ‘글’ 근처에서 먹고사는 직업이고, 옛날 일제시대 시인들 직업을 보면 기자가 많지 않나.
물론 그 사이에 잠깐씩 농부를 꿈꾼 적도 있었고 철학자나 지리학자를 꿈꾼 적도 있었다. 지리학자라는 꿈은 꽤 진지했다. 온 방에 지도를 사 붙여 놓고 주야장천 지도책을 보며 놀던 때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지리학자(지리학과 교수님?)가 되려면 공부를 너무 오래 해야 했기 때문에 포기했다. 그냥 지리학과만 졸업해서 지도를 만들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지도 만드는 회사가 우리나라에 정말 있기나 한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요즘처럼 내비게이션이 필수품이 되는 시대가 올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어쨌든 그렇게 정리된 꿈과 장래희망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라는 장래희망을 바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출판사에서 어쨌든 비슷하게 ‘글을 가지고 노는’ 일을 하다가 결국 언론사로 들어오게 됐으니 별로 돌아 온 것은 아니다. 다만 시인이라는 꿈이 있었는지는 가끔 기억도 가물가물. 한 달에 한 편, 분기에 한 편, 반년에 한 편, 시 한 편 쓰는 것조차 점점 까먹어가고 있다.
지난날의 꿈 이야기를 이렇게 지루하게 한 것은 ‘넌 지금 꿈이 뭐냐’는 질문의 대답을 미루기 위해서다. 지금, 나이 서른둘의 유부남 보도업체 종사자인 내 꿈은 뭘까. 시인이 되겠다는 꿈은 이뤄도 좋고 안 돼도 그만인 것이 됐으니, 그런 데다 감히(!) 꿈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곤란하다. 설마 이러다 정말 꿈을 추억하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 나이가 돼가는 걸까. 먹고사는 일 앞에서 모든 것은 하찮아지는 나이가 돼가는 걸까. 정말 꿈이 없어진 건지, 아니면 ‘내 꿈은 이거다!’ 하고 말할 용기가 없어진 건지도 헷갈린다.
꿈이라 자랑할 자신은 없지만, 곰곰 생각하니 내게도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 그건 노동자들의 ‘글쓰기 멘토’가 되는 것. 세상은 글쓰는 사람들을 무서워한다. 세상이 마땅히 무서워해야 할 사람들, 하지만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숱한 ‘머릿수’로만 기억돼온 노동자들이 바로 ‘글쓰기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삶을 글로 남기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과 세상의 주인이 되라고 말하고 싶다.
기자라는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고, 회사를 벗어나서 그 일만 할 수 있다면(한마디로 그 일로도 밥벌이가 된다면) 더 좋겠다. ‘마흔 전 귀촌’이라는 목표와 함께 그런 삶을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자면 그 전에 책도 좀 내야 하고 기자로서 또는 강사로서 인지도(!)도 무럭무럭 키워놔야 한다. 지금 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그런 삶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 그나마 참 다행이다.
서른두 살이라는 나이가 꿈을 말하기에 이렇게 어색한 나이인 줄 몰랐다. 꿈 이야기를 하면 뭔가 좀 희망적이고 진취적인 느낌이 나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자꾸 ‘이게 꿈이 맞나’ 움츠리게 되고 ‘요까지만 말할까’ 빼게 되고 ‘비웃으면 어떡하지’ 쫄게 된다. 어쨌든 이제 이렇게 써놨으니 어쩔 수 없다. 오랜만에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를 좀 들어봐야겠다. 꿈이라는 말, 내가 다시 익숙해져야 할 말이니까.
* <난지도 파소도블레>(blog.daum.net/nanpa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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