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그는 뭐 쫌 뭇나?”
“자, 교대로 밥 묵고 해라.”
“언니야, 빨리 요 와가 한 숟가락이라도 무라.”
큰아버지 상을 치르는 사흘 동안 가장 많이 오간 말들이 아닐까 싶다. “밥 무라.” 우리는 서로에게 밥을 권했다. 누구도 진심으로 그 음식들을 맛있게 먹은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가 서로에게 ‘너라도 든든하게 밥을 먹고 씩씩하게 기운을 내라’ 했다. 밥을 먹고 먹이면서,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녹이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는 청춘’이라는 예순아홉의 연세. 한창 인기 있는 예능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에 나오는 ‘막내’ 백일섭보다 젊다. 올해 벌초도 손수 하시고 추석 바로 전날까지 일을 나가셨단다. 그 전에 감기인지 몸살인지 머리가 계속 아프다 해서 MRI니 뭐니 다 찍어봤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하고. 추석을 쇠고 결국 병원에 입원해서 한때 중환자실에도 잠깐 계셨지만 다시 호전돼서 일반 병실로 돌아오셨다 했다.
추석 날 댁에 누워 계신 것을 뵈었으니 딱 열흘 만이었다. 9월 30일.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것은 네 시쯤이었다. 많이 좋아지셨다고, 그날 점심도 혼자 드시고 약도 챙겨 드시고 신문을 보면서 정치인들 욕도 하셨다 한다. 그렇게 모두를 안심시켜 놓고서는 두어 시간 만에,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셨다. 몇 년 몇 달씩 투병하다 돌아가셨다고 한들 슬픔이 덜할까마는, 너무도, 너무도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바로 회사에서 나와 아내를 데리고 출발했다. 부모님을 내 차로 모시고 포항으로 가야 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할머니. 장남의 죽음 소식을 누가 알리기는 했을까. 아신다면 지금 제정신으로 계시기는 할까. 모르신다면 언제 어떻게 알려야 할까. 그리고 큰어머니, 사촌형, 아버지까지. 앞서 달려가는 내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그 아슬아슬하고 무거운 시간을 도로 위에서 보냈다.
영정 앞에서 아버지는 통곡하셨다. 큰고모도 오열하며 힘 풀린 손으로 아버지의 등을 때리셨다. 큰아버지가 다른 사람을 보고 ‘저 사람 대구동생(아버지) 아니냐’며 그렇게 찾았는데, 왜 이제 왔느냐고 우셨다. 큰어머니는 반쯤 혼절하신 채 울고 계셨고. 누군가 잔부터 올리라 해서 나도 무릎을 꿇고 영정 앞에 앉았다. 그 순간 네다섯 시간 동안 아슬아슬하게 눌려 있던 슬픔이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큰아버지가, 정말 가신 건가.
이튿날 아침, 견디기 힘든 긴장이 흘렀다. 바로 고모부님이 할머니를 모시러 갔기 때문이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이미 고모할머니가 가서 전하셨다고 했다. 하룻밤 동안 할머니를 위로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시게 한 다음, 아들의 마지막 길에 인사를 하게 빈소로 모시고 오게 된 것이었다. 할머니가 어떤 모습으로 들어오실까. ‘큰일’ 나지 않고 무사히 보실 수 있을까. 모두 걱정하며 기다린 끝에 할머니가 오셨다.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신 할머니. 영정 앞에 의자를 놓고 앉혀드렸더니 기어이 통곡을 하셨다. “부모 앞에 먼저 가는 게 제일 불효다” 소리를 치며. 더 크게 우실 기운이 없어서 잦아질 듯 우시는 모습에 가족들 모두 따라 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큰어머니가 잠시 혼절을 하셨다. 팔다리를 주무르고 물을 드리고 청심환도 드시게 했다. 그렇게 ‘폭풍’이 지나가고, 할머니는 입관식은 결국 못 보고 큰댁으로 다시 가셨다.
가족들에게는 슬퍼하는 일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절차에 맞춰서 장례를 진행해야 하고 문상객들을 맞아야 하고, 큰아버지를 어디로 어떻게 모실지도 얼른 결정해야 했다. 나도 사촌형들과 같이 상주 완장을 차고 문상객들을 맞이했다. 곡을 하고 절을 하고, 가끔은 음식을 나르거나 필요한 물건을 구하러 뛰어다니고. 어찌 보면, 가만히 앉아서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돌아가실 거라고 정말 아무도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준비라고 할 만한 것이 돼 있을 리 없었다. 다행히 살아 계실 때 몇 번, 당신은 화장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단다. 가족들은 그 말씀에 따라 화장을 하고 납골묘에 모시기로 뜻을 모았다. 70년 가까이 ‘있어온’ 사람이 ‘없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사흘. 보내드리는 것도 너무 바빴다. 물론 그 ‘없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
셋째 날 아침 발인식. 내가 영정을 들었다. 화장장으로 가기 전에 영정을 모시고 큰댁에 들러 정든 공간과 이별하게 해드렸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큰댁으로 들어가는 길.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큰댁에 계신 할머니가 이 모습을 보고 또 어떻게 견디실까. 하지만 뜻밖에 할머니는 씩씩하셨다. 작은방, 큰방, 거실을 한 바퀴씩 돌고 할머니가 앉아 계신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할머니는 꾹꾹 참았던 눈물을 다시 터트리셨다. ‘자식들 봐서라도, 손주들 봐서라도 할머니가 꿋꿋이 이겨내셔야 한다’는 말을 누가 옆에서 했다. ‘더 이상 발목 잡지 말고 훌훌 편하게 보내주시라’는 말도 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눈물은 흘리셨지만 이제 그만 울겠다고, 편한 곳으로 잘 가서 아버지(할아버지) 만나서 잘 지내라고 하셨다. 할머니의 그 약속을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화장장에 간 지 두어 시간 만에 큰아버지는 회색 재로 돌아가셨다. 타고 남은 뼈 사이에서 큰아버지의 인공관절과 의치 같은 것들을 골라냈다. 흰 종이에 싸인 재와 뼛가루는 축구공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한 흰 항아리에 담겼다. 항아리를 품은 사촌 큰형과 영정을 든 내가 같은 차에 타고 공원묘역으로 갔다. 가는 길에 포항제철을 지났다. 큰아버지가 일하셨던 곳. 노제는 지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쭉 한번 둘러보셨겠지.
감포 바다가 보이는 전망 탁 트인 산등성이에 큰아버지를 모셨다. 사촌 누나가 “아버지 등산 좋아하셨는데, 여기 경치도 좋고 엄청 좋아하시겠네. 벌써 여기저기 구경하시느라 바쁘시겠다” 했다. 위패와 영정은 할머니가 평소 다니던 절에 모시고, 우리는 이제 상복을 벗었다. 저녁 때가 가까운 시간, 큰댁에 가서 할머니도 뵙고 밥도 ‘묵고’ 가자고 해서 모두 큰댁으로 갔다.
할머니는 울지 않고 계셨다. 같이 계시던 고모할머니는 ‘아까 실컷 울게 놔뒀더니 이제 울 힘도 없어서 그만 우는 모양’이라 하셨다. 울지 않겠다는 말씀, 지키지 않으셔도 좋았다.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든든했으니까. 우리는 저녁을 시켜 ‘묵고’ 또 다시 밥과 술을 서로 권하며 앉았다. 누구도 신이 나서 웃지는 않았지만 실없는 농담도 하면서, 서로를 슬픔에서 건져내려고 이리저리 손을 내밀고는 했다.
큰어머니가 흰 봉투를 하나 꺼내시더니 내 아내한테 전해주셨다.
“추석 때 왔을 때 임신했다는 소식 듣고 용돈도 한 푼 못 줬다고 미안해하셨다. 큰아버지가 느그 주라고 챙겨주신 거니까 나중에 아기 낳고 필요한 데 잘 써라.”
큰어머니도 우시고, 아내도 울었다. 어릴 적 생각이 났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큰아버지가 ‘우주보안관 장고’가 그려진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를 사주셨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내게 큰아버지는 마치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큰댁에 가면 할머니와 함께 우리 집안의 제일 큰 어른으로 계시는 분.
그 돈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일단 작은 상자에 담아 장롱에 넣어 뒀다. 내년 봄이면 내 큰조카인 보연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그 돈으로 나도 보연이에게 가방을 사줄까 생각 중이다.
* <난지도 파소도블레>(blog.daum.net/nanpa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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