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운전을 안 좋아합니다. 원래 겁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딜 가나 교통체증과 주차난에 시달리는 게 싫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통 주차장 구석에 차를 세워만 두는데, 삼일절 연휴 때는 간만에 장거리 운전을 했습니다. 멀리 경주에 계신 외할머니를 뵙고 왔거든요. 고속도로와 국도를 오가며 느긋하게 다녀왔는데, 지난달에 업그레이드한 내비게이션도 모르는 새 길이 또 생겼더군요.
대도시들을 잇는 고속도로는 오래전에 다 생겼고, 중소도시들을 잇는 고속도로도 참 많이 생겼습니다. 이름을 특별히 붙이는 것도 지쳤는지, 그냥 ‘○○-★★ 간 고속도로’ 하는 식의 이름을 단 고속도로들이 자고 일어나면 생겨납니다. 그리고 ‘산업도로’라는 이름의 자동차 전용도로들도 구석구석 많이도 생겼습니다.
새로 생기는 도로들은 굴곡이 적고 거의 직선으로 돼 있습니다. 산이 있어도 강이 있어도, 돌아가지 않고 터널을 뚫거나 다리를 놓아서 곧장 달려갈 수 있게 했습니다. 고속도로에선 시속 110킬로미터까지 ‘합법적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속도입니다. 그런데 이 ‘속도’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까요?
건설회사와 지자체는 시간단축과 경제효과를 열심히 홍보하고, 언론은 그걸 받아쓰기 바쁩니다. 하지만 그렇게 점점 빨라진 세상의 속도가 우리 같은 ‘일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줬나요? 한 시간 걸리던 곳을 30분 만에 가는 세상이 오면, 우리는 한 시간 동안 하던 일을 30분 만에 하도록 강요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도로 위에서 줄어든 시간만큼 일해야 할 시간이 길어지는 건 아닐까요? 몇 억이니 몇 조니 하는 경제효과 역시, 우리가 그렇게 더 빨리 일해서 누군가에게 벌어줘야 할 ‘기대이익’을 뜻하는 건 아닐까요?
‘빠르다’는 것의 기준이 점점 높아지면서, 어제까지 빠르던 것도 오늘은 느린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 빠름을 행복으로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은 그 ‘빠름의 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어제 하나 돌리던 나사를 오늘은 두 개씩 돌리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기계를 빨리 돌리고, 짐을 빨리 나르고, 셈을 빨리 하고……. 너무 빠른 세상의 속도를 ‘행복’이 따라가지 못하는 게 분명합니다.
물론 느린 것은 불편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해치며 무작정 세상의 시계를 빨리 돌리는 것이 ‘편리’라면, 차라리 좀 불편한 게 낫겠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빨리 달려야 하나 생각해보면, 답은 단순합니다. 세상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앞으로만 달리는 직선 위에서 내려올 때가 아닌가 합니다. 천천히 옆도 보고 뒤도 보고 위아래도 살펴보면, 세상은 직선이 아니라 입체라는 사실도 알게 될 겁니다.
새 봄입니다. 여기저기 떠나는 사람들도 많고, 때맞춰 새로 생긴 길도 많겠죠. 어딘가 고속도로가 새로 생겼다는 소식보다, 구불구불 산과 강을 돌아가는 마을길이 새로 단장됐다는 소식을 듣고 싶은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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