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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시대의 첫 날, '뿌리'를 살펴봅니다

긴 글/칼럼

by 최규화21 2013. 2. 2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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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 오늘은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일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당선자’라고 쓸 때와는 또 다른 기분입니다. 낯설고 착잡하지만 이제 익숙해져야겠지요. 담담하게 ‘박근혜 시대’를 맞이해보려 하지만 막상 취임식에서 그가 대통령으로서 선서를 하는 장면을 보면 또 한 차례 속이 뒤집힐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12월 20일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두 달 전 그날 ‘멘붕(멘탈 붕괴}’에 빠졌다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투표율에 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당선을 점친 사람이 많았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했나요? 그래서 그 다음 날로 아예 텔레비전 뉴스를 안 본다는 사람도 많았고,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아예 선거가 무효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그 뒤로 며칠 사이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도 있었죠.


오늘 공식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그런 멘붕에 빠질 사람이 있을까 좀 걱정입니다. 하지만 행여 마음이 그리 가더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함부로 ‘멘붕’이니 좌절이니 포기니 절망이니 하는 말을 입에 담으면, 저 철탑 위의 사람들이 누구를 보고 싸우겠습니까. 일터로 돌아가자는 오래된 열망 하나로 간신히 버티고 선 저들의 발밑을 누가 지키겠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투쟁을 시작한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 그들이 지금 서울 혜화동 성당 종탑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명박 정권 5년을 꼬박 길거리에서 보내고, 다시 박근혜 정권의 출범을 맞고 있습니다. 26일, 내일은 그들이 투쟁을 시작한 지 1895일째 되는 날. ‘1895일’은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들이 복직 약속을 받아내기까지 투쟁한 날들입니다.


내일에서 하루가 더 지나면 재능교육 노동자들은 그들의 기록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최장기 투쟁 신기록’을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코오롱 해고 노동자들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9년째 투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하루를 어떻게, 따뜻한 집에서 잠자고 편안한 사무실에서 앉아 일하는 제 하루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참혹함이란, 감히 말로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 그들이 말하더군요. “함부로 ‘멘붕’을 이야기하지 말아달라”고. 지난해 대선 직후에 열린, 노동자 잡지 <작은책>의 송년회에 참석한 재능교육 노동자의 부탁이었습니다. 침울한 표정의 참석자들 앞에서 “여러분들이 좌절하고 포기하면 우리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부디 멘붕이라 말하지 말고 흔들림 없이 연대해주십시오”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호소했습니다. 오늘 그의 목소리가 다시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좀 식상한 말이지만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 노동자의 호소에, 혜화동 성당의 종탑에, 평택과 울산의 송전철탑에 뿌리를 둔 사람들은 오늘 같은 날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박근혜 시대의 첫 날. 제 뿌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나 조심스레 발밑을 살펴보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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