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 외 인생
벌써 10월이다. 수첩을 보니 토요일 일요일은 체육대회와 결혼식으로 이미 꽉 찼다. 운동복과 양복 정장을 번갈아 입으며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내 20대의 마지막 가을도 저물어 갈 것이다.
어제 출판 노동자 체육대회를 마치고 뒤풀이를 하는데 한 여자 후배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2년째 만나고 있는 애인이 결혼은 빨리 하자고 하면서 돈 벌 생각을 안 한다는 거였다. 그 자리에는 20대에서 40대까지, 남녀 기혼자와 비혼자가 고루 있었는데, 순간 ‘100분토론’을 방불케 하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남 얘기라고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니냐”는 반박을 들은 내 의견은 “좋으면 결혼하고 아니면 말어”였다.
그게 내 결혼관이다. 애인이 백수에 팔푼이든, 재벌 2세에 꽃미남이든, 좋으면 같이 살고 싫으면 안 사는 거다. 돈을 좀 못 벌거나 집이 없거나 차가 없다고 좋던 사람이 싫어진다면 당연히 헤어져야 하는 거고, ‘그런데도’ 좋다면 같이 사는 거다. 조금 가난해도, 전세방에 살아도, 버스만 타고 다녀도 좋은 사람하고 같이 살아야 진짜 행복한 것 아닌가?
물론 결혼을 재테크나 효도 관광 같은 걸로 여기는 사람들한테는 씨도 안 먹힐 소리다. 며칠 전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인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운영하는 결혼지원센터(www.match.kr)의 결혼중개시스템 가입자 등급이 누리꾼들의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결혼 정보 업체에서 학력이나 소득, 직업, 부모의 재산이나 지위 같은 걸 기준으로 가입자의 등급을 매긴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기업이 아니라 엄연히 나랏돈을 지원받는 결혼지원센터 사이트에서도 그걸 똑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리꾼들은 “국민이 무슨 쇠고기냐?”, “결혼 안 하고 40세 넘기면 도축할 기세”, “세금으로 헛짓 하는 것 한두 번 본 건 아니지만 이건 정말……” 하고 분노의 댓글을 달았다. 물론 중간 중간에 “없는 놈들이 등급에도 못 끼니까 열폭(열등감 폭발)하네” 하는 댓글도 있었지만, 사실 그런 놈들은 돈은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정신머리만은 확실히 없는 놈들이니 귀한 시간 쪼개 일일이 대꾸해 주는 친절은 기대하지 말 것.
그런데 나는 사실 그 기사를 읽고도 별로 열 받지도 않고 그냥 담담했다. 그렇다고 내가 ‘있는 놈’이라서 폭발한 열등감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나도 물론 예전에는 결혼 정보 업체 ‘듀X'의 등급 기준이라고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동료들과 함께 호기심에 열어 봤다가, 웃자고 읽은 글에 죽자고 기분 더러워진 ’등급 외 인생‘들끼리 그날 저녁 소주를 퍼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분노도 비참함도 없이 다만 한마디 중얼거렸을 뿐이다. “역시 이명박.”
이명박이 누군가. “비즈니스 후렌들리”라는 발음도 후진 구호를 앞세워 경제도 기업에게, 정치도 기업에게, 사회도 문화도 기업에게 다 퍼 주고는, 한 나라의 최고 정치 지도자로서는 파격적이게도 “나는 정치는 잘 모른다”라고 ‘쿨’하게 고백하면서, ‘대한민국 공화국’을 ‘대한민국 주식회사’로 과감히 전향하여 UN에서 호적을 파서 나스닥에 입적시키려는 인물 아닌가. 바야흐로 ‘이명박 시대’를 살아가자면 국민들 시집 장가 보내는 것도 당연히 기업식으로 해야 하는 것이니, 결혼 정보 업체의 회원 등급쯤 빌려온 거야 놀랄 일도 아니다. 오히려 결혼지원센터를 진작에 ‘듀X'나 ’X스클럽‘에 넘겨 민영화하지 않은 것이 이상한 거다.
딸내미 일자리 없을까 봐 대한민국 청년들은 죄 이북으로 넘어가 주기를 바랐던 유명환이라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부정(父情 또는 不正)에 감동받아 있던 누리꾼들은 부모의 지위와 경제력이 등급 기준에 들어 있는 걸 문제 삼았다. 그리고 또 하나, 결혼 정보 업체에서나 하는 ‘등급질’을 얼추 국가 기관 비슷한 데서 나랏돈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익부 빈익빈이니, 20대 80이니 해서 대대로 부자인 사람들이 대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서글프게 하는 일이 많은데, 결혼까지 분수에 맞게들 하라는 그놈의 대물림 등급을 나라에서 친히 정하고 자빠졌으니 이놈의 나라가 제대로 된 나란가 하고 의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평생의 배필을 찾는 데 부모의 지위, 재력, 직업, 연봉, 학벌 같은 걸로 매겨진 등급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제일 큰 문제 아닌가? 물론 아무리 ‘비즈니스 후렌들리’라고 해도 기업에서나 하는 짓을 나랏돈 받는 데서 뭣도 모르고 베껴 온 것은 당연히 얼빠진 짓이다. 하지만 기업에서 하든 나라에서 하든 처녀 총각들한테 1등급, 2등급 도장을 찍어 놓고 가락시장에서 배추 경매하듯이 팔아치우고 거간비나 받아먹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말이다.
그 등급이라는 게 어쩌면, “어차피 남자나 여자나 다 거기서 거기고, 살다 보면 돈 많은 게 장땡”이라는, 오래전에 먼저 시집 장가 가서 아들딸 낳고 걔네들을 또 시집 장가 보내 보신 어르신들의 소중한 삶의 지혜에서 우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 등급은 젊은이들이 결혼 상대를 찾을 때 필요한 기준이 아니라, 엄마 아빠들이 사돈을 찾을 때 필요한 기준이라고 해야 옳다 싶다. 그러면 차라리 ‘결혼중개시스템’이 아니라 ‘사돈중개시스템’이라고 했으면 욕 한두 마디쯤은 덜 먹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어차피 ‘등급 외 인생’ 판정을 받을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이왕 눈에 들어온 거라 기사 밑에 덧붙여진 등급표를 한번 들여다봤다. 역시. 옛말에는 ‘짚신도 짝이 있다’고 했지만, 역시 짚신은 짝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짚신은 댓돌 위에 올라갈 수도 없다고 할까? 가죽신이나 고무신, 하다못해 나막신이라도 돼야 댓돌 위에서 짝이나 맞춰 볼 수 있는데, 이건 아예 댓돌 아래 흙 마당에 구르는 꼴이니 짝이고 나발이고 어림없다.
하지만 나도 장가 좀 가게 등급에 좀 껴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어차피 엄마 아버지가 쎄 빠지게 벌어 놓은 돈 날름 물려받겠다는 생각도 없고, 마누라 등쳐 먹으면서 떵떵거리겠다는 생각도 없고, 자식 하나 잘 ‘조련’해서 판검사 아버지 소리 듣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내가 쓰는 만큼 내 힘으로 일해서 벌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랑을 지킬 만큼만 넉넉하게 살겠다는 거다. 어차피 삶의 기준이 이렇게 다른 나 같은 사람은 그 따위 등급에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갈 필요도 없다.
오늘 다시 결혼지원센터 누리집에 들어가 보니 “등급화 부분을 없애고 가정 환경, 소득, 직업, 학력 지수를 검색 항목에서 삭제 조치하였”다는 공지가 뜬다. 뭐 일단은 좀 쫄기는 한 것 같으니까 기분은 좋지만 어차피 ‘듀X’나 ‘X스클럽’의 가입 기준에, 우리 엄마나 당신 아버지의 마음속에, 그리고 당신과 당신의 애인의 머릿속에 그 등급은 그대로 있을 것 같아 여전히 기분은 씁쓰레하다. 돈이야 늘 없었으니 이제 익숙하고, 권력이야 있어 봤자 누릴 줄도 모르고, 무엇보다 그런 돈과 권력을 마누라 덕에, 장인어른 덕에 얻는 것은 쪽팔려서 싫은 나는 그냥 ‘좋은 짚신’ 만나 흙길이나 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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