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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운동'으로 불우이웃을 돕는다?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3. 2. 2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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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쇠고 나니 봄이 금세 올 것 같은 기분이다. 날씨가 여전히 춥다 하지만 확실히 지난달 같지는 않고, 회사 앞 길가에 꽁꽁 얼어 있던 눈 무더기도 어느새 거의 녹아내렸다. 그리고 요 며칠 사이 회사 앞에서 보게 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불우이웃돕기 누리꿈스퀘어 상인회 척사대회”라는 펼침막이다.   


흠, 뭔 소릴까. 누리꿈스퀘어는 우리 회사가 세 들어 있는 건물 이름이다. 이 건물 상가의 상인회에서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무슨 대회를 연다는 소리 같은데 ‘척사’라니, 저게 뭘까. 먼저 떠오른 것은 ‘위정척사운동’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구한말에 주자학을 지키고 가톨릭을 물리치기 위하여 내세운 주장에서 시작해, 외국과의 통상 반대 운동으로 이어진’ 위정척사운동을 가지고 불우이웃을 돕는 건 말이 안 된다.


‘던질 척’ 자를 쓴 것 같으니 뭔가를 던지는 건가 싶었는데, 창을 던진다는 건지 포환을 던진다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이거 참 부끄러운 노릇이다. 편집기자라는 양반이 상인회에서 내건 펼침막 하나 무슨 뜻인지 모른다니. 사나흘 정도 펼침막 앞을 오갈 때마다 궁금타 생각하다가 결국 오늘에야 그 자리에서 서서 국어사전 어플을 켰다. 이런 허무한 경우가 있나. 그 뜻으로 딱 세 글자가 나왔다.


척사(擲柶) [-싸] 명사」『민속』 = 윷놀이


척사대회는 윷놀이 대회였다. 짜증이 확 났다. 그냥 윷놀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척사라고 한 까닭은 뭔가. 한자로 쓴다고 딱히 뜻이 더해지는 것도 아니다. ‘던질 척’에 ‘숟가락 사’, 그냥 윷가락을 던진다는 뜻으로 만든 윷놀이의 한자말이다. 이 펼침막을 만든 분이라고 해서 집에서 명절에 식구들한테 “우리 윷놀이 한 판 할까?”라고 안 하고 “우리 척사 한 판 할까?” 하지는 않겠지. 아마도 ‘윷놀이 대회’라고 쓰자니 좀 대회의 급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격조 있는(?) 한자말을 찾아 쓴 게 아닐까 싶다.  


우리는 여전히 “밥 먹었냐”고 묻자니 너무 가벼워 보여서 굳이 “식사(食事)했냐”고 묻고, “고맙습니다”라고 하자니 예의 없어 보여서 “감사(感謝)합니다”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중국의 한자말은 높은 분들이 쓰는 귀한 말이고 우리 한글은 상스러운 말을 적는다 해서 ‘언문’이라 업신여기던 시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만 든다. 안 쓰는 토박이말들을 되살려도 시원찮을 판에 아직도 토박이말을 두고 한자말부터 찾나.


한창 혼자 속으로 성질을 막 내다가, 이게 나만 모르던 말인가 싶어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한번 두드려봤다. 웬걸, 기사 검색을 하니 ‘정월대보름 맞이 척사대회 성료’ 하는 식의 기사 제목이 수도 없이 뜬다(‘척사’로도 모자라 ‘성료’까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말을 살리고 섬겨야 할 언론인들이 앞장서서 토박이말을 뭉개는 꼴이다. 제목이야 그냥 “정월대보름 맞이 윷놀이 대회 열려”쯤으로 하면 안 될 게 뭔가.


하지만 가끔 그럴 경우는 있다. 한자말을 비롯한 외래어가 이미 너무 익숙해져서 토박이말을 살려 쓰는 게 더 이해가 안 되는 경우들 말이다. 마치 이 교차로에서는 다 신호위반을 하니까 위반 안 하고 신호를 지키는 사람이 이상하게 더 미안해지는 경우 같다고나 할까. 일상생활 속에서 말하고 글쓸 때는 그렇다 쳐도, 언론 기사의 제목이나 문장을 쓸 때라면 마냥 신호위반을 계속 하고 있는 게 옳은 건지 좀 돌이켜볼 일이다.


쉬운 ‘윷놀이’를 두고 굳이 어려운 ‘척사’ 대회를 열겠다는 상인회를 야단치려던 마음이 결국에는 또 언론인이라는 사람들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부메랑처럼 돌아오고 말았다. 하긴 이 바닥이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기사를 쓰자면서, 실제로 일하면서는 “야마를 못 잡아서 우라까이 살짝 하고 크로스도 한번 했으니 데스킹 많이 할 것 없이 적당히 서브톱에서 롤링해주라”는 얘기가 오고 가는 동네 아닌가(이 말이 무슨 뜻인지 한 번에 알아들었다면, 당신은 이미 언론인).


시민들을 ‘주인’의 자리에서 밀어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의 말을 ‘기록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 땅의 주인인 사람들이 쉽게 쓰는 고유의 토박이말을 일상 속에서 지키고 살리는 것은, 특종 기사 ‘한 방’으로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일임을 여러 언론인들이 알았으면 한다. 올해 정월대보름 날, 달을 보며 빌 소원은 이것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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