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의 눈물... “아빠가 미안하다”
눈물이었다. 이리저리 조금씩 일그러지던 아버지의 얼굴 위로 결국 눈물이 한 줄기 주르륵 흘렀다. 얼마 만에 보는 아버지의 눈물인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까 한 10년쯤 됐겠다. 외할아버지의 시신을 입관하던 날, 아버지가 외가 마당에 주저앉아 엉엉 우시는 모습을 나는 저기쯤에서 그저 안쓰럽게 바라봤다. 좀 불쌍하기도 했고, 사실 그때는 그뿐이었다.
아버지의 눈물을 또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오늘은 누가 봐도 기쁜 날. 우리 신혼집에 엄마, 아버지, 누나들, 자형들, 조카들까지, 우리 최씨네 식구가 처음으로 모두 놀러온 날이었다. 점심 때는 장인어른, 장모님과 사돈끼리 같이 식사도 하고, 오후부터는 좁은 전세방이 미어터지게 찾아온 누나네 식구들과 왁자지껄 재미나게 놀아댄 날이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사온 회로 해도 지기 전에 일찌감치 술판도 벌렸고, 결혼 두 달 만에 치른 첫 집들이는 시끌벅적했다.
지금 생각하니 사람들 웃기기 좋아하는 엄마가 무슨 실없는 소리를 한마디 한 것이 화근이었다. 엄마를 놀려대다가, 이제는 다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엄마의 역대 ‘망언’까지 하나둘 추억하고 있을 때, 말없이 지켜보고 계시던 아버지가 말문을 열었다. 큰누나의 고3 시절 이야기. 아버지가 큰누나한테 4년제 대학 말고 2년제 전문대를 가라고 했단다. 물론 돈 때문에. 그런데 처음에는 알았다고 컴퓨터 자격증도 따고 아버지 말을 듣는 것 같았던 큰누나가 대학 등록을 코앞에 두고 울면서 ‘4년제 가고 싶다’고 말했다는 거였다.
그 눈물 때문에 아버지는 마음을 돌려서 4년제 대학 진학을 허락하셨고, 착한 맏딸은 학비가 싼 지방 국립대에 합격해 아버지의 짐을 덜어줬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큰누나한테 전문대에 가라고 한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둘째 조카를 안고 17년 전 그 이야기를 듣던 큰누나는 도르르 굴러나오는 눈물 몇 방울을 민망한 표정으로 웃으며 닦았다. 지금은 다 나름대로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소소한 행복들은 누리며 사는 처지니까, 그냥 훈훈하게 들으며 같이 웃을 뿐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아버지의 눈물샘은 작동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큰누나가 그 시절의 이야기만으로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가난한 집안의 맏딸이니까 동생들을 위해 희생해달라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자신을 떠올렸을 게다. 해가 지고, 일찍부터 시작한 술자리를 한번 정리하는 사이 아버지는 좀 쉬시겠다고 방에 들어가셨다. 우리는 저녁을 간단히 차려먹고 또 부지런히 이야기꽃을 피웠다. 낮술이 과했던 자형들은 다른 방에 가 잠들었고, 누나들과 나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방으로 나를 부르셨다. 소주나 한 병 들고 들어오라고. 마른안주 한 접시뿐인 단출한 술상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두어 잔 잔이 돌 때까지도 아버지는 장가간 아들에게 어느 아버지나 으레 해줄 법한 덕담이나 당부들을 해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다 갑자기 아버지의 눈이 발갛게 충혈돼 올랐다. 이리저리 조금씩 일그러지던 아버지의 얼굴 위로 결국 눈물이 한 줄기 주르륵 흘렀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며 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았고, 나는 다른 손으로 얼른 방문을 닫았다.
“아빠가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하다.”
이따금 콧물을 훌쩍거리며, 아버지가 자꾸 같은 말을 하셨다. 고개를 숙이고 아래로 텅, 텅 뱉어내는 “미안하다”는 그 말 덩어리가 시커먼 쇳덩어리의 모습으로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무쇠 같은 사나이, 내 머릿속의 아버지가 한숨처럼 내뱉은 그 마음은 쇳덩어리가 틀림없었다. 40년이 다 되도록 아버지의 마음속에 들어 있던 그 서늘한 마음을 보며, 내 마음은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고, 그저 내 손을 쥔 아버지의 손등에 내 다른 손을 가져다 대고 느리게 토닥일 뿐이었다.
“너희들한테는 강한 아버지이고 싶었다”라고 말하고, 아버지는 눈물을 닦으셨다. 큰 숨을 쉬며 마음을 고르는 모습을 보니 그때부터는 나한테서 눈물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강한 아버지. 근 40년 동안 아버지의 삶을 내리누르고 있었을 그 다섯 글자.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아버지. 맨손으로 도시의 삶에 내던져진 가난한 농부의 아들은 ‘강한 아버지’라는 그 다섯 글자에 인생을 묶었을 거다. 강한 아버지가 되지 못해 흔들리고 나약해졌던 순간들이 자식들은 모르는 미안함으로 남았겠지.
그 순간 내 마음이 뭉클했던 것은, 그렇게 강하게 우리들을 지켜온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은 아니었다. 이제 한 사람의 아내로, 남편으로 자식들을 다 키워내고, 소박하나마 가정을 꾸리고 사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그 짐을 내려놓은 아버지. 수십 년 맺히고 눌려 있던 그 속을 ‘풀어내는’ 우주 같은 무게의 순간을 내가 목격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한 세대를 물려주려는 아버지의 성스러운 의식에 내가 그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이는 사람으로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금세 마음은 다시 차분해지고 오히려 편안해지기까지 했다. 그동안 무쇠 같은 ‘가장’으로만 존재했던 아버지가 그 짧은 시간을 통해 이제서야 ‘아버지’가 된 것 같다고나 할까. 옛날에 아버지가 한창 술을 마시던 시절을 두고 엄마는 “느그 아빠는 만날 술 먹고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느라’ 술을 마신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겠다. 오히려 그 술의 절반쯤은 ‘하고 싶은 걸 다 못했기 때문에’ 마신 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의 눈물이 뱉어낸 쇳덩어리 같은 ‘아버지’의 무게. 그리고 그 순간에 손으로 가슴속으로 전해진 아버지의 체온, 아버지의 역사. 눈물 한 방울을 통해 아버지의 인생이 내 삶으로 저릿하게 파고들어왔다. 서른두 살의 새해 벽두, 나는 한 뼘쯤 더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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