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 하나 때문에... ‘크리스마스의 악몽’
연말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올해는 대통령 선거 때문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그저 그렇지만, 예년 같으면 진작부터 여기저기서 캐럴도 틀고 트리도 만들어 올리고 ‘크리스마스 특수’를 맞느라 바빴을 거다.
올해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이달 초에 본 크리스마스 씰 광고 덕분이었다. 결핵 퇴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된다는 그것. 크리스마스 카드에 우표랑 같이 붙이면 간지가 좔좔 흐른다는 그것을 올해는 프로야구 구단의 마스코트로 예쁘게 만들었단다. 하지만 이내 그 광고는 잊지 못할 기억을 하나 떠올리게 했다. 내 인생 최초의 ‘필화’ 사건. 14년 전 그날의 가혹한 기억 말이다.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 시절, 크리스마스를 일주일쯤 앞둔 딱 이맘때였다. 종례를 하러 들어온 선생님이 크리스마스 씰이 나왔다고 보여줬다. 음, 드디어 나왔구만. 교회를 다니지 않던 나는 그때도 크리스마스 씰이 나와야 크리스마스 시즌이 왔다는 걸 느끼곤 했다. 그때는 연말이면 크리스마스 씰 사기, 여름 태풍철에는 이재민 돕기 ‘사랑의 쌀’ 모으기가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지표 가운데 하나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늘 크리스마스 씰이 나오면 담임선생님의 판촉(?)이 이뤄졌다. 이게 언제 유럽에서 시작됐는데 우리나라에는 선교사 누가 언제 들여왔고, 하면서 유래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 요걸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고 ‘온정의 정신’을 설파했다. 어떤 선생님은 우리나라도 옛날에 미국 사람들이 사준 씰 덕분에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면서 이제 우리도 은혜를 갚자며 ‘한미동맹 강화’로 결론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애들이 그걸 사나. 초등학교 때는 나름 크리스마스 카드도 만들고 몰래 책상 서랍에 넣어놓을 이성 친구도 있었으니 꽤 많이들 사는 분위기였지만, ‘남녀가 유별해진’ 중학교 이후로는 남자들은 대부분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우리를 달래기도 하고 화도 내면서 몇 명쯤 손을 들게 하고는 어려운 숙제 하나를 끝낸 표정으로 교실을 나가고는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크리스마스 씰을 사라고 했다. 하지만 판촉 활동 같은 건 없었다. “씰 살 사람?” 하고 짧게 묻더니, 아무도 손을 안 든 걸 보고는 “그래, 느그가 살 놈들이 아이지” 하는 것이었다. 우이씨, 난 손 들려고 했는데. 그때 나는 취미로 우표나 병뚜껑, 상표 등을 수집하고 있었다. 물론 큰돈을 들여서 희귀품을 구하러 다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1~2천밖에 안 하는 크리스마스 씰 정도는 사려고 했다.
“야 실장(반장), 이거 두 사람 앞에 하나씩 나눠줘라. 둘이 반씩 갖고 돈은 둘이 합쳐서 내든, 한 놈이 다 갖고 한 놈이 돈도 다 내든, 하이튼 둘이 알아서 내일 돈 갖고 온나.”
그걸로 끝. 선생님은 휭하니 나가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이게 뭐야. 왜 이걸 억지로 사야 돼! 물론 내 짝한테 내가 씰을 다 갖고 돈은 내가 내겠다고 하면, 내 손에 씰 한 세트가 들어온다는 것에는 변함없었다. 천 원짜리 한두 장이 아까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씰을 사는 이유가 뭔가. 적은 돈이지만 뭔가 좋은 일도 하고 예쁜 것도 모을 수 있다는 뿌듯함 아닌가. 선생님은 나한테서, 그 뿌듯함을 빼앗아가버린 것이다.
그것도 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학생들한테, 온정의 상징인 크리스마스 씰을, 강제로 팔다니. 그냥 판매 실적을 올리는 것 외에 이게 무슨 교육적 효과가 있단 말인지, 우리는 교실에서 이 씰을 사면서 뭘 배웠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이 자꾸 뻗어나가다 보니, 이건 그냥 나 혼자 열 받고 말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선생님이 이렇게라도 씰을 팔아야 하는, 무슨 ‘검은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도 됐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글을 썼다.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내 분노를 뒤죽박죽 담았다. 어른들이 신문 사설 같은 데 쓰기 좋아하는 심각한 한자말도 토핑처럼 촘촘 뿌려 얹었던 것 같다. 그러고는 막 배우기 시작한 인터넷과 이메일이라는 놈을 이용해, 집에서 받아보던 지방 일간지에 ‘독자투고’로 보냈다. 그때는 익명이고 뭐고 그런 것도 몰랐기 때문에 땡땡고등학교 1학년 몇 반 최규화, 시원하게 다 까발렸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신문부터 펼쳐봤다. 마당에 선 채로 독자투고 면을 펼쳤는데……, 뭐야 이거. 없다. 실망했다. 그래, 보낸다고 다 실어주는 게 아니겠지. 역시 어른들의 세계는 견고하구나, 하고 낙심하고 말았다. 그렇게 그냥 울적하게 하루를 보내고(물론 착하게 크리스마스 씰 값도 냈다. 막상 선생님 얼굴을 보니 오프라인에서 반항하는 건 좀 무서웠다), 그 다음 날. 그날도 역시 착하게 등교해 조례를 기다렸다.
교실 문이 꽤 거칠게 열렸다. 선생님이 평소보다 미간을 더 찌푸린 채로 교실에 들어오지도 않은 채 나를 불렀다. “최규화, 일로 나와봐 이 새끼야”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상황이 파악됐다. 뭐야, 왜 하루 지나서 실린 거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질문을 오래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최대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복도로 나갔다. 선생님의 단발 스매싱. 이유를 알고 있으니 반항도 하지 않고 나는 순순히 교무실로 연행됐다.
담임선생님에서 교감선생님, 교감선생님에서 학년주임 선생님과 학생주임 선생님까지 돌림빵(?)으로 취조를 당했다. 미쳤냐, 돌았냐, 그래서 뭐 어쩌려고 썼냐, 선생을 뭘로 보는 거냐 등. 나중에야 알았지만, 물 먹은 줄 알았던 내 글이 하루가 지나서 실린 것은 신문사 마감시간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교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이제 내 뼈와 살은 인수분해가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거의 맞지를 않았다.
선생님들의 취조도 뒤로 갈수록 점점 ‘앞으로는 선생님한테 먼저 얘기해’ 하는 식으로 나를 달래는 것 같았다. 기분이 묘했다. 절대 이러실 분들이 아닌데……. 특히 나의 죄질(?)을 볼 때 전설적인 드러머 링고 스타의 드럼질(?)처럼 내 엉덩이를 비트 있게 두드리고도 남았을 텐데, 그냥 머리만 몇 대 쥐어박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런 놈은 잘못 때리면 또 맞았다고 신문에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묘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밤이 돼서 집으로 왔다.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열어보니 모르는 사람들한테서 메일이 몇 통 와 있었다. 메일을 열어보니, 고등학생 글을 보니 반갑다, 우리 학교도 그랬다, 속이 시원하다, 학교 가서 안 맞을까 걱정이다, 힘내라……. 신문에 실린 내 글을 읽은 다른 학교 학생들이 보낸 메시지였다. 내 이름 옆에 적힌 메일 주소를 보고 응원 메시지를 보내준 것이다.
그날 밤은 가슴이 설레서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메시지 가운데 무슨 여고 학생이 보낸 것도 하나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이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면서는 느끼지 못한 느낌, 내가 쓴 글이 세상을 조금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조금 움직인다는 느낌. 이런 일을 하는 사람, 정말 멋있을 것 같았다. 기자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바로 그때였다.
그 뒤로 1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정말 기자로 살고 있다. 시민기자들의 기사를 편집하다가 가끔 청소년이 쓴 기사를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더 꼼꼼히 들여다보게 된다. 14년 전 그날, 한 편의 글 때문에 한쪽에서는 문초를 당하고 한쪽에서는 응원을 받은 그날의 오묘한 기억 때문일까. 그 청소년 시민기자에게는 바로 오늘이 그날이 되지는 않을까, 기대하고 걱정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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