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만에 결혼하기, ‘신의 한 수’가 필요해!
내 방에 일대 위기가 찾아왔다. 드디어 ‘과민성 독거청년’이라는 문패를 내려야 할 순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내 기분은 아주 ‘상콤’하다. 뭐 시원섭섭하다는 이도 저도 아닌 기분 말고, 정말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 죽겠다. ‘독거청년’이라는 별명을 사용할 수 있는 날도 불과 열흘 남짓밖에 남지 않은 상황. 그렇다. 드디어 내가 독거를 탈출한다. 장, 가, 간, 다.
‘난지도 파소도블레’에 처음 와보는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조차 없을 것이고, 그래도 이 블로그를 간간이 봐온 사람들이라면 ‘저 찌질이가 뭔 이명박 리듬체조 하는 소린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불과 석 달 전인 8월 초에 “내게는 여자가 필요하다... 하나 말고 '넷'” 하는 제목으로 온갖 궁상스런 소리를 늘어놓았으니 말이다. 그럼 그때 구라를 친 것이냐 항의하지는 말아달라. 모든 역사는 그 뒤로 이루어졌다.
당시만 해도 엄마의 전방위적 압박이 실재했다. 위로 두 누나는 이미 시집을 가서 아들딸을 줄줄이 낳고 알콩달콩 살고 있었으니, 막내인 나만 장가를 가면 엄마에게는 더 남은 걱정거리가 없었다. 명절날 윷놀이를 하면 누나들은 다 제 짝꿍끼리 편을 먹었고, 나는 엄마와 편을 먹어야 했다(아버지가 계실 때는 조카와 한 편이 된다). 그때마다 엄마는 “한 명만 더 있으면 짝이 딱 맞을 낀데” 하면서 누가 봐도 나 들으라는 소리를 혼잣말인 듯 했고, 나는 애써 그 말들을 허공에 흩어버렸다.
지난여름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체는 ‘듀○’. 엄마가 누누이 해온 “느그 누나도 거서 했다고, 니는 100만 원만 주면 선생 며느리 소개해준다 카더라” 하는 말이 생각났다. 커플매니저라는, 이름도 거창한 전화 속의 여인은 이제 나를 직접 공략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몇 번 통화해보니 어머님은 마음이 있으시던데 아드님이 완강하다고 곤란해하시더라고요. 어머님이 비용도 부담해주신다는데 그냥 편하게 한번 만나보시죠. 교사나 공무원 여성들도 만나보실 수 있어요.”
졸지에 나는 돈까지 대주겠다는 엄마를 곤란하게 만드는 고집불통 노총각 아들이 돼버렸다. 하지만 그동안 이 아줌마가 귀 얇은 엄마 옆구리를 얼마나 찔러댔는지 생각하니 성질이 뻗쳐서, “나한테든 우리 엄마한테든 다시 한 번만 더 전화하면 내 입에서 좋은 말 안 나갈 겁니다” 하고 딴에는 야무지게 전화를 끊었다.
어쨌거나 올해를 ‘결혼의 문을 열어젖히는 해’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해줬으니 그것으로 ‘듀○ 아줌마’의 역할은 긍정적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초여름에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나고 있었지만, 그 시기는 내년이나 그 이후로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물론 나 말고 여자친구의 생각). 그래서 결사적으로 RPM을 올렸다. 온갖 설득 끝에 ‘연내 결혼’에 원칙적으로 합의! 8월 중순에 양가 인사를 마쳤다.
다행히 어느 쪽에서도 큰 반대가 없었다. 여자친구의 어머님이 너무 빨리 데려가는 것 아니냐고, 천천히 준비해서 내년 봄에나 하지 그러냐는 ‘우려’를 보인 정도였다. 내가 내세운 명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룰 까닭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동충하초도 아니고, 꼭 사계절을 겪어봐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역설했다. 연애를 아무리 길게 해도 어차피 살다보면 서로 다른 점은 무수히 발견될 것이니, 그때마다 그것을 맞춰갈 서로의 마음과 품성만 확인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강변했다. 결국 어머님도 ‘오케이’.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예식장. 여기저기 얘기를 들으니 결혼시즌에는 6개월 전에 예약해두지 않으면 예식장이 없다고 했다. 이미 날짜는 8월 말로 가고 있는 상황. 12월에는 대선이 있으니 결혼휴가를 쓰는 것이 너무 눈치 보였고, 11월에 예식장을 구하지 못하면 ‘짤없이’ 내년으로 넘어가야 했다. 더군다나 고향에서 친지들이 올라오기 좋은 강남이나 서초의 예식장을 구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상견례는 9월 초. 정석대로라면 상견례 이후에 신부 쪽에서 날을 받아주시면 그날에 맞춰서 예식장을 잡아야 하는데……. 적신호였다. 지난 한 달여 동안 두 여자(여자친구와 어머님)의 ‘오케이’ 사인을 받기 위해 얼마나 짱구를 굴려댔는가! 예식장이 없어서 결혼을 내년 봄으로 미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신의 한 수’를 선택했다. 상견례 1주일 전, 전격적으로 예식장 계약을 해버린 것이다. 먼저 위치를 고려해 예식장 후보를 두세 군데 정하고, 우리가 11월 안에 무조건 해야 하니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알려달라고 했다. 대부분은 저녁 시간밖에 없다는 답이었지만, 운 좋게도 일요일 점심 때 딱 한 타임(자기네들 말이니 ‘뻥’일 가능성도 있다) 남았다는 예식장이 있었다. 바로 계약금을 들고 가 사인. 그것으로 모든 우려와 고민은 ‘지난 일’이 돼버렸다. 예식장 계약을 마치고 이뤄진 상견례 자리는 그저 훈훈하기만 했다.
격식 따지지 않고 자식들의 선택을 믿어주신 마음 넓은 부모님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뭐 이런 근본 없는 놈이 있느냐고 언짢게 생각하실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재바르게 잘했다고도 해주셨다. 그 뒤로는 그야말로 일사천리. 상견례 다음 날 내가 살던 집이 빠져서, 사나흘 뒤에 신혼집 계약까지 마쳤다. 신혼여행이니 혼수니 예물이니 하는 것들은 솔직히 돈만 주면 다 되는 것들. 돈이 적당히 있으면 비싼 걸 하나 싼 걸 하나 고민했을 텐데, 돈이 별로 없으니 고민 없이 그냥 싼 걸로 쉽게 해치우고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연애는 두 달, 결혼 준비는 석 달. 남들은 결혼 준비를 하면서 그렇게 싸운다던데, 우리는 아직 언성 한번 높인 적이 없다. 나는 하나님도 부처님도 알라신도 조상신도 안 믿지만, 사람 일에는 ‘천운’이라는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둘러 하는 결혼이라 얼렁뚱땅 될 수도 있는데, 하나도 막히는 것 없이 술술 풀리고 차곡차곡 준비되는 것을 보면 정말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가끔은 우리 엄마가 쌓아놓은 덕을 내가 보는구나 싶어서 새삼 고마울 때도 있고, 결혼 의지를 불태워준 ‘듀○ 아줌마’까지 고마워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선배들(오직 남자들)은 “에라 자식아, 니가 언제까지 그렇게 좋나 보자” 하지만, 그래 뭐 언제까지 좋은지 그렇게 관심 갖고 지켜봐주신다면 나야 영광이다. 총각 시절이 열흘 남짓밖에 안 남았지만 그것도 뭐 별로 아쉽지도 않고, 앞으로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별로 압박스럽지 않다. 다 내가 바라고 기다려온 것들인데, 이제 와서 아쉬워하고 버거워하는 건 무슨 못난 짓인가!
다음번부터는 ‘과민성 독거청년’이라는 간판은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이다. 고민이 많다. ‘과민성 동거청년’으로 한 글자만 살짝 바꿀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독거’와 ‘동거’가 주는 느낌이 너무 달라 별로다. 독자들에게 ‘이름 짓기 댓글 이벤트’ 같은 걸 제안하고도 싶지만, 평소에도 ‘무플’에 허덕이는 주제라 못하겠고. 그래도 자발적으로 새 이름을 ‘부조’해주신다면 감사히 고민해보겠다. 선물은 신간 문학도서 두 권 정도면 괜찮으려나? 아무튼 ‘찌질한 독거남’ 신세를 청산하고 ‘찌질한 유부남’이 되어 돌아오겠다. 잠시만 안녕.
씰 하나 때문에... '크리스마스의 악몽' (0) | 2012.12.20 |
---|---|
<26년>의 마지막 장면, '회초리' 같았다 (0) | 2012.12.05 |
아침마다 맛보는 지옥... "뚱보여 제발!" (0) | 2012.10.29 |
'오마이뉴스'요? 그런 건 없습니다 (0) | 2012.10.23 |
'보통결혼'에 1억7000만원, 이거 너무 잔혹해 (0) | 2012.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