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의 마지막 장면, ‘회초리’ 같았다
12월의 첫날, 아내와 결혼 후 첫 데이트를 했다. 결혼 첫 주는 신혼여행에 처가·친가 방문으로 일요일까지 알뜰하게 보냈고, 둘째 주는 열흘 만의 출근에 정신 못 차리고 허덕댔다. 이대로 주말까지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토요일 저녁 늦게 집을 나섰다. 마침 결혼식에 오지 못한 한 선배가 선물로 보내준 영화예매권이 있어서 집에서 가까운 영화관으로 갔다.
연애할 때 우리는 영화를 잘 안 봤다. 아내는 만화영화를 좋아하고 난 사회성 짙은 독립영화나 스포츠 영화를 좋아한다. 더군다나 ‘대사의 맛을 느낄 수 없다’는 핑계(사실은 자막을 보는 게 귀찮다는 것이 진짜 이유)로 외국영화를 안 보는 나 때문에 우리 둘은 영화관 데이트를 거의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어떤 영화를 볼까 좀 고민이 됐지만, 사실 내 마음속에는 ‘둘 중 하나’로 결정해둔 상태였다. <남영동 1985>와 <26년>. 하나는 고 김근태 전 장관의 수기를 바탕으로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전두환 정권의 야만을 보여주는 영화고, 다른 하나는 1980년 광주학살의 피해자들이 26년 뒤 ‘그 사람’ 전두환에게 복수를 시도한다는 강풀의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였다.
이런 ‘묵직한’ 영화들이 나란히 스크린에 걸려 있는 행운이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내를 잘 설득해서 둘 중 하나는 오늘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남영동 1985>를 보자고 했다. 아내는 자기도 그 영화를 안다며, 좋은 영화 같긴 한데 고문하는 건 잔인해서 싫다고 완곡히 거절했다. 그렇다면 <26년>. 무슨 영화냐고 묻길래 대충 설명했더니, 강풀의 원작 만화를 봤다고 흔쾌히 좋다고 했다.
2시간 30분. 표를 끊고 보니 영화가 꽤 길다. 영화가 끝나면 자정이 가까운 시간일 텐데도 영화관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우리도 겨우 맨 앞줄을 피해 둘째 줄 구석 자리를 얻었다. 객석이 비어 있을까 걱정했는데, 한 것도 없이 괜히 내가 고마웠다. 이 영화는 투자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투자를 꺼려서 몇 번이나 제작이 연기되다가, 지금에서야(올해는 1980년으로부터 ‘32년’째 되는 해 아닌가) 일반 시민들이 ‘제작두레’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 영화였다.
이중에도 제작두레에 참여한 사람들이 와 있겠거니 생각도 했다. 영화 상영 전 광고를 보며 앉아 있다가 약간 감격(?)한 마음에 아내한테 아는 척을 좀 했다. 이 영화가 시민들의 돈으로 만들어졌다느니 하면서. 그랬더니 아내한테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아~ 그 영화가 이 영화구나. 영찬이가 무슨 영화 만드는 데 자기도 돈 냈다 그러던데. 영화사에서 DVD도 준다고 자랑하더니 여기 참여한 거였구나.”
영찬이는 아내의 남동생, 내 처남이다. 아직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서 그랬을까. 아니 그것보다 제작두레는 어떻게 알고 참여했을까. 정말 뜻밖이었다. 결혼 전, 아내가 가끔 처남은 만날 돈 벌고 차 꾸미고 놀러갈 궁리만 한다고 혀를 차던 것이 기억났다. 아내는 처남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도통 관심이 없다고 걱정했는데.
정말 부끄러웠다. <26년>의 제작두레가 시작할 때부터 나는 알고 있었지만, 내가 거기에 돈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1980년 광주’는 민주주의의 고향이요, 영원한 양심의 거울이라는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면서도. 10년쯤 전 5월에는 서울 종로의 아스팔트와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따가운 햇볕을 받고 누워 “5월정신 계승하자”고 외치던 사람이면서도. 군 복무를 하던 때에도 해마다 5월이면 휴가를 내고 광주 금남로 거리와 망월동 묘역으로 찾아가던 사람이면서도.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에는 처남처럼 제작두레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갔다. 처남의 이름을 찾으려고 계속 보고 있었는데, 이름이 다 올라가는 데에만 10분이 넘게 걸린 것 같았다. 나중에 ‘<26년> 제작두레’ 누리집에서 확인해보니 참여인원이 2만1685명, 누적금액이 7억4048만 원(12월 3일 기준)이었다. 자기 실명을 밝히기도 쑥스러웠는지 ‘호돌이아빠’, ‘26년파이팅’ 하는 식으로 이름을 써둔 사람도 참 많았다.
영화 자체도 참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지만, 나는 엔딩크레딧을 보는 10여 분의 시간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소리 없이,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앞으로 밀어 움직이는 소중한 사람들. 제 이름을 내세우고 ‘나 잘났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서도 세상을 조용히 바꿔나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음을 깨달으며 말할 수 없이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찔끔 눈물이 나려 한 것도 바로 그 ‘마지막’ 장면에서였다.
팔자에 없던 기자라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 슬쩍 면죄부를 주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신문을 만드는 것으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여기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세상이 굴러가는 데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힘을 보탤 생각은 안 하고, ‘세상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논평만 늘어놓는 구경꾼이 돼버린 것은 아닌지. 그러면서 글 몇 자 잘 써서 이름이나 알리고 ‘지식인입네’ 폼 잡으며 살거나, 아니면 완전히 반대로 사장님 눈치 보면서 내 새끼 밥그릇만 걱정하는 좀생이로 살려는 것은 아닌지.
‘처남과 2만여 명의 사람들’은 내게 회초리를 들었다. ‘머릿수 하나 채우기 위해 나서는 착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꿔간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주면서. 하지만 그것은 ‘머릿수만 채우면 되지 뭐’ 하는 생각으로는 절대 안 되는 일이다.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늘 예민하게 들여다보고 재바르게 몸을 움직여야만 하는 일. <26년>은 내게 ‘100년’의 가르침을 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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