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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괴동 150-3번지, 잊을 수 없는 '그곳'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3. 1. 1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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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괴동 150-3번지, 잊을 수 없는 ‘그곳’



  해가 바뀌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 대통령 당선인과 함께 2013년도 역시 떠들썩하게 시작했다. ‘국민대통합’ 시대를 쟁취한 51% 남짓의 국민들은 희망에 부풀어 새해를 맞았을지 모르겠지만, 2번, 그것도 정권교체니 야권 단일화니 하는 압박에 등 떠밀려 생전 처음 2번을 찍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러나저러나 새해 새 희망 같은 건 별로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암튼 좀 잘사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야 나도 같지만, 새로운 대통령도 뽑았고 새해도 됐는데 달라진 게 없었다. 한 나라가 얼마나 잘사는지를 보려면 그 나라에서 제일 못사는 사람이 얼마나 못사는지를 보면 된다. 그래서 내가 새해를 맞으며 지켜본 곳은 청와대도 국회도, 제야의 종을 치는 종로 보신각도 아니었다. 엄동설한 눈바람을 맞으면서도 ‘살아보자’고 기어올라간 노동자들이 있는 ‘철탑 위’였다.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150-3번지. 잊을 수 없는 주소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한때는 수천 노동자의 일터였고, 한때는 피가 튀는 전쟁터였고, 지금은 송전철탑 위에서 “해고자 복직”을 외치며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싸움터. 노동 월간지를 만드는 잡지사에서 글을 읽고 쓰며 일하던 2009년 여름 스물여덟 살 그때, 처음 그곳으로 가기 위해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그 주소를 잊을 수가 없다.


  쌍용차가 그해 초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정리해고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4월부터 2646명에 대한 희망퇴직과 정리해고가 시작됐다. 노조는 5월 말 옥쇄파업에 들어갔고 6월부터 회사와 정부는 공권력 투입을 운운하며 노조를 압박했다. 7월이 되자 취재진은 물론 음식물과 식수, 의료진의 진입까지 차단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공장 밖의 가족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것뿐이었다.


  그곳은 전쟁터였다. 회사 관리자들과 비해고자, 용역업체 직원들이 연합한 ‘사측군’은 ‘노조군’이 점거하고 있는 도장공장을 향해 부지런히 무력시위를 했다. 공장 담장 안에는 중장비가 탱크처럼 오가고 중무장한 사람들이 열을 지어 다니며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한편으로는 고향과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선무방송을 해, 파업 이탈을 유도하기도 했다. 공장 밖 소문으로는 경찰의 강제진압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하루 와서 취재를 할 뿐이었지만, 내내 온몸의 신경은 공장 안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언제 시작될지 몰랐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화염병과 쇠볼트를 던지며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분위기였다. 인터뷰 내내 눈물을 참았다 흘렸다 하던 가족들과, 정문에서 의약품 반입을 요구하며 몸싸움을 하던 의사들, 그리고 중재 협상 결과를 발표하던 국회의원 중재단 정도를 취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와서 며칠 지나지 않은 때였던 것 같다. 자정이 가까운 야심한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전 취재에 함께한 르포작가 형님이었다.


  “개구멍이 뚫렸대. 내일 해뜨기 전까지만 오면 들어갈 수 있다는데, 기자들 두어 명이 들어갈 모양인가봐. 너도 나랑 같이 들어갈래 어쩔래?”


  며칠째 외부의 접근이 차단된 공장에 길이 잠깐 열린 것이었다. 형님의 말은 지금 택시를 타고 잡지사 사무실에서 만나서 잡지사 차를 타고 평택으로 가자는 거였다. 서울에서 평택까지는 얼추 한 시간 반. 야심한 시간이라면 한 시간 만에도 갈 수 있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공장으로 들어간다. 공장 밖만 맴돌던 지난번의 아쉬움을 날려버릴 수 있다. 아니 그 정도 일이 아니다. 식수도 음식도 전기도 끊긴 곳에서, 안으로는 굶주림과 두려움, 밖으로는 경찰과 사측 ‘연합군’과 싸우는 이들의 속으로, 종군기자가 되어 들, 어, 간, 다.‘


  일단 편집장님께 물어보고 말해주겠다 했다. 전화를 걸고 따르릉 신호가 가는 동안 생각이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그 치열한 생존의 순간을 기록한다는 것은 기자로서 더없는 기회였지만, 언제 나올지 기약이 없으니 월간지 발행이 ‘빵꾸’ 날 수도 있는 거였다(당시 편집부는 나 혼자뿐이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라는 생각도 들다가, 안전보장 따윈 안 되는 곳에서 다치거나 덜컥 연행이라도 되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이름도 없는 월간지 기자라, 취재활동으로 인정도 안 되는 것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편집장님이 가지 말라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을 하다가도, 또 금세 차라리 말려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편집장님은 말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확실히 가보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가서 뭘 어떻게 쓸지도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게 의지가 있다면 월간지 마감은 어떻게든 할 테니 가봐도 좋다는 정도였던 것 같다. 끊고 다시 르포작가 형님한테 전화를 했다. 역시 신호가 가는 사이에 많은 생각을 했다. 가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지만 무엇보다 선명했고,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여럿이었지만 모두 좀스러웠다.


  짧은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나는 가지 않았다. 뭐라 핑계를 댔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잠깐 위에서 생각한 것들을 두서없이 말로 옮겼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유는 딱 하나다. 무서웠던 거다. 혹시나 쇠볼트라도 맞을까 무섭기도 했을 것이고, 경찰에 연행되는 게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매달 발행일을 지키느라 며칠 밤을 새던 월간지가 ‘빵꾸’ 나는 것이 무섭기도 했을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하루 ‘예상할 수 있게’ 흘러가던 내 일상이 예상할 수 없이 어지러워지는 것이 무서웠을 거다.


  그 뒤로 3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의 강제진압은 실제로 시작됐고,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 서둘러 노사 합의가 이뤄졌다. 그때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어쩌다 입때껏 기자로 살게 되면서, 그날은 정말 치욕스러운 날로 기억되고 말았다. 막 글을 쓰며 먹고살기 시작한 20대 후반의 나이에 ‘무서움’ 때문에 현장에서 도망을 치다니. 기자로서도 노동자로서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이 내게 남긴 것도 있었다. 바로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다. 멀찍이 물러나서 이래라저래라 훈수만 두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나처럼 늘 미안해하기만 하는 사람도 알 수 없다. 오직 그곳에서 전쟁처럼 싸우고 기록하는 사람들만이 현장의 가치를 안다. 철탑에서 길거리에서 피땀으로 싸우고 기록하는 사람들을 절대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함부로 평가하지 말자는 것은 그때 생긴 내 철학이다.


  경기 평택 쌍용자동차, 충남 아산 유성기업, 전북 전주 버스·택시 노동자, 울산 현대자동차 등. 땅에서 사람으로 살지 못한 사람들이 공중으로 올라가 한 점 ‘현장’을 만들었다. 해를 넘기며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은 잇따른 노동자들의 부고뿐. 해가 바뀌기 전에 다섯, 해를 넘기고 나서도 또 한 사람이 스스로 목을 맸다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곳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대선도 새해도 무엇 하나 바꿔놓지 못했다.


  새해가 열흘째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2012년, 2013년이라는 것은 우리의 달력일 뿐. 철탑 위 그곳의 달력은 ‘농성 며칠째’로 오늘도 한 장 더 넘어갈 뿐이다. 3년 반 전 그 여름, 무서움 때문에 내가 도망친 그 현장에서 23명째 참혹하게 흘러온 죽음의 시간들. 그 시간을 견디고 철탑 위에서 희망을 짓고 있는 이들이 자랑스럽다. 부끄러움밖에 남지 않은 나지만, 그렇다면 그 부끄러움이라도 다해 그들과 어깨를 겯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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