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봄이다. 날씨는 아직 아침저녁으로 봄과 겨울을 오락가락하지만 그래도 3월이면 ‘공식적으로’ 봄이다. 지긋지긋한 눈과 추위가 한 발 물러나니 참 반갑기 그지 없지만, 봄과 함께 찾아오는 불청객도 있다. 황사? 아니, 연봉협상이다. 다른 데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우리 회사는 연봉협상을 봄에 한다. 이 협상의 성패에 적금, 보험, 외식, 이사, 출산 등 우리 가족의 크고 작은 살림살이가 좌우된다.
연봉협상은 자기평가서를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1년간 뭘 잘했나 자랑해보라’는 건데, 이게 참 신경 쓰인다. 특히 나처럼 특종도 없고 대박 기획도 없는 ‘병풍 같은 존재감’의 기자들에게는. A4용지 두 장이 넘게 쓰는 사람도 있고 달랑 세 줄 쓰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이런저런 변명(?)들을 주절주절 써서 A4용지를 3분의 2쯤 간신히 채워 냈다. 그러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대체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오마이뉴스> 편집부 기자 최규화의 하루는 어떨까.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연중무휴’ 사이트를 굴려야 하는 인터넷신문의 특성상 편집기자의 출근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다들 제각각이다. 일단 보통의 직장인들처럼 오전 9시까지 출근하는 걸로 생각해보자. 그럼 오전 7시 일어난다. 한 시간 동안 씻고 밥 먹고, 한 시간 동안 만원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출근투쟁’에 승리했다 치자.
일단 컴퓨터를 켜면 사내 게시판을 두루 확인한다. 누가 나한테 맡기고 간 일이 있나 보는 거다. 그리고 메일과 쪽지를 확인. 이어 시민기자들의 소통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사실상 ‘대편집부 민원게시판’이 된 게시판을 확인한다. 여기서 잠깐,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오마이뉴스>는 시민기자 제도로 운영되는 신문이다. 시민 누구나 기자회원으로 가입해 기사를 쓸 수 있고, 그 기사는 편집부의 검토를 거쳐 채택되고 노출된다.
‘민원게시판’에는 별의 별 민원이 다 올라온다. 자기 기사가 검색이 안 된다고 하면 개발팀으로 넘겨주고, 회원 아이디를 까먹었다고 하면 전략기획팀으로 넘겨준다. 자기 기사가 왜 채택이 안 됐냐고 물으면 ‘생나무클리닉’(채택 안 된 기사를 생나무라고 부른다)으로 넘기고 자기 기사 어디를 좀 수정해달라고 하면 수정요청 게시판으로 넘기는데, 그래봤자 거기도 내 담당이다. 밤새 올라온 민원 가운데 급한 것부터 처리하고 생나무클리닉 게시판과 수정요청 게시판을 확인한다. 거기도 역시 급한 것부터 처리.
급한 불을 껐으면 기사 목록 창을 연다. 편집기자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따끈따끈한 기사들이 늘어서 있다. 먼저 들어온 순서대로 하나씩 열어 검토한다. 일단 주제를 확인하고 눈으로 빨리 훑어내려 기사의 가치를 파악한다. 글을 쓴 사람에게는 모두가 ‘톱기사’겠지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생나무로 둘 것은 두고, 정식 기사로 채택할 것은 배치등급(톱기사부터 ‘오름’, ‘으뜸’, ‘버금’이라고 부른다)에 따라 ‘만지기’ 시작한다.
앞뒤가 안 맞으면 여기 글을 잘라서 저기 붙이고 거기 글을 썰어서 여기저기 나눈다. 팩트가 의심될 때는 글쓴이한테 전화해서 물어보고, 취재를 더 해야 하면 보강취재를 부탁하거나 내가 직접 하기도 한다. 문장이 말이 안 되면 요리조리 예쁘게 다듬고, 빼먹고 안 쓴 게 있으면 잘 어울릴 수 있게 써서 채워 넣어준다. 그리고 독자의 이해를 도울 사진을 찾아 ‘있어 마땅할’ 자리에 넣고, 독자의 관심을 끌 제목과 부제, 중제를 만들어 넣는다. 그렇게 편집이 마무리되면 배치 등급에 맞게 ‘2차 검토자’에게 넘기는 것으로 끝.
어디 가서 편집기자라고 하면 교정 보고 제목 뽑는 것만 하는 사람으로 오해 또는 폄하(!)들을 한다(기자들 중에도 그렇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런 이들의 기사는 딱 그 정도 선까지 만져준다). 하지만 그건 기사를 보는 일 중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편집기자 일의 핵심은 기사의 가치를 판단하고 기사의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일이다. 거기에 문장력과 어문규정에 대한 지식은 부가되는 것뿐.
그런 일을 편집기자 대여섯 명이 하루에 150~200번 정도 한다. 계속 밀려드는 기사를 보고 있으면 가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하는 기분도 든다. 하지만 매번 같은 나사를 박아야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새 기사를 볼 때마다 새로운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퇴근시간이 있지만 저녁 약속을 장담할 수는 없다. 특히 기사 마감(오후 8시)에 가까운 시간대 근무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퇴근을 한두 시간씩 넘기고 야근을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날그날의 기사 수급과 배치, 이슈와 현장 상황에 따라 퇴근시간은 조금씩 달라진다.
퇴근시간까지 주로 하는 일은 이런 기사 검토 일이지만, 그것만 하는 게 아니다. 짬짬이 시민기자 게시판들을 두루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무시로 걸려오는 의견, 제보, 욕설, 하소연(?) 전화를 받는 것도 편집부의 몫이다. 취재기자들은 외근이 많기 때문에 편집국으로 걸려오는 전화들은 주로 편집부에서 받는다. 어쩌다 우리 기사에 ‘맺힌 게 많은’ 분과 통화를 하게 되면 30분 넘게 ‘체험! 욕의 현장’을 찍게 될 때도 있다. “빨갱이”, “개마이뉴스”는 그냥 인사 같다. 처음에는 뚜껑도 가끔 열렸지만, 이젠 그저 ‘인격수양’으로 여길 뿐.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하게 맡고 있는 것, 바로 서평단 관리다. <오마이뉴스>에는 시민기자 서평단이 있다. 출판사에서 사무실로 보내온 홍보용 신간 도서를 뜯어서 목록을 올리고, 서평단의 신청을 받고, 포장해서 소포로 보내고, 그걸 읽고 써준 서평기사를 맡아 검토하는 것까지 내 몫이다. 일주일에 들어오는 책이 적으면 50권, 많으면 100권 정도니까, 하루에는 이 일을 다 못하고 일주일 동안 야금야금 나눠 한다.
그밖에 다달이 서평단을 선정하고 통보하는 일, 생나무클리닉 닥터로 활동하는 시민기자의 민원을 해결하고 수당을 챙겨주는 일, 인상적인 활동을 펼친 시민기자들을 인터뷰해 한 달에 한 번쯤 기사를 쓰는 일, 지역면이나 섹션면을 배치하는 일, 검토한 기사에 대한 사후처리(관련자의 문제제기나 수정 및 보강)나 시민기자 윤리강령 위반자 색출(?) 등, 일일이 설명하기 힘든 자잘한 일들이 더 있다. 또 같은 편집부라도 기획이나 배치를 전담하고 있는 기자들의 일은 내 일과 많이 다르다.
퇴근시간이 오후 6시라면 (평균치를 잡기가 힘들지만) 보통 6시 30분에서 7시쯤 퇴근한다. 7시를 넘겨 퇴근하기가 일쑤인 직장인들이 많으니, 요건 좀 부러울 거다. 하지만 다달이 출퇴근 시간대가 바뀌는데, 오후 9시가 퇴근시간인 ‘마감 당번’이 되는 달에는 퇴근시간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게 좋다. 마감 전에 들어온 기사를 다 봐야 하니까 9시든 10시든, 마음을 푸근히 비우고 있다가 퇴근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나는 <오마이뉴스> 편집부 기자로서, 하루 종일 이렇게 일한다. 나는 분명 하루 종일 기사를 다듬고 자르고 붙이고 꾸미지만, 지면에 내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다. 기사 하나에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고, 누군가는 명예에 대단한 손상을 입는다. ‘사실과 다른’ 기사 때문에 누가 그런 억울한 일을 겪을세라, 또는 조금 더 읽기 좋은 기사를 만드느라 나도 하루 종일 눈이 빠지게 기사를 만지지만, 기사는 그것을 쓴 사람의 이름으로만 나간다. 나의 노동은 ‘그림자 노동’이다.
내 노동은 세상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 그 기사를 쓴 기자와 나(가끔은 기사를 쓴 이도 내가 자기 기사에서 어디를 어떻게 고쳤는지 모를 때가 있다. 보통 예쁘게 고친 건 모르고 고치다 틀린 것만 알아챈다). 섭섭할 때도 억울할 때도 있지만, 그 일이 싫다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한테 맞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현장에서 열심히 써낸 거친 기사에 내 노동으로 날개를 달아주는 것, 그게 내 일이다.
세상에서 오직 두 사람밖에 모른다고 해도, 나는 내 노동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냥 파묻히고 말았을 기사를 길게는 며칠 동안 보강하고 다듬어서 톱기사로 만들고, 그 기사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파장을 일으킬 때, 나는 말로 다 못할 긍지를 느낀다. 이렇게 받쳐주는 사람이 있어야, 조금 부족한 사람도, 아직은 열정만 앞서는 사람도 용감하게 기사를 쓰겠다 나설 수 있는 것 아닌가. 보통 사람들도 “편집기자야, 내 뒤를 부탁해!” 하고 기사를 써댈 수 있어야, 세상이 보통 사람들을 좀 무서워할 게 아닌가.
내일은 오전 8시 출근이다. 아침부터 앞서 말한 일들을 해치우느라(?) 이런 긍지 따위 느낄 겨를도 없을지 모른다. 아침부터 걸려온 욕설 전화에 뚜껑부터 한번 열었다 닫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게 다 내 일이고 내 인생이다. 하루의 내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이 어느 시민기자에게는 희망이 되고 감동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행운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내일도, 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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