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보통결혼'에 1억7000만원, 이거 너무 잔혹해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2. 9. 18. 23:46

본문


  ‘보통결혼’에 1억7000만원, 이거 너무 잔혹해



“뭐어?! 치일배액?!”


술이 확 깼다. 그것도 신부랑 엄청 싸워서 ‘쇼부’를 본 액수였다니……. 10월에 결혼을 하는 고등학교 동기놈을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친구들이 모였다. 서울 강남역 어디쯤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부터 ‘확실히 잘나가는 놈들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혼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이놈들 입에서 구체적인 ‘액수’가 나오기 시작하니, 정말 ‘레벨’이 다르다는 게 실감났다.


10월에 결혼하는 놈 말고 결혼 1년차와 3년차인 놈들도 있었다. 한 놈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자동차회사를 다니고, 한 놈은 국책은행을, 또 한 놈은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중앙정부에서 일하는 놈이었다. 부부 연봉을 더하면 ‘1억’이라는 놈, 아니 ‘분’들은 얼마짜리 예물을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반지 한 쌍에 ‘700만 원’이란다. 그것도 원래는 1000만 원짜리를 해달라는 걸, 대판 싸우고 300만 원을 깎았단다.


‘18K 반지 한 쌍에 50만 원이나 하더라’는 얘기를 하려 했던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가만 입을 다물었다. 또 한 놈은 사진 20장 찍는 데 200만 원 하는 스튜디오에서 웨딩 촬영을 했다고 했다. 연예인 누가 결혼할 때 거기서 사진을 찍었다나 뭐라나. 어차피 결혼하고 나면 아무도 안 보는 웨딩앨범 하나 만드는 데(‘내가 결혼해봐서 아는데’ 하는 소리는 아니고, 다들 그러더라 뭐) 반나절 동안 내 한 달 월급을 날렸다니!


내가 그야말로 ‘멘탈붕괴’ 상태로 할 말을 잃고 앉아 있으니, 다들 그 정도도 안 하고 어떻게 장가갈 생각을 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래도 한 5년 직장 다니고 사회생활을 했는데(그것도 갖가지 정보와 뉴스가 모이는 언론사에서!) 그 자리에서 난 정말, 순정만화처럼 알콩달콩 하트만 뿅뿅 있으면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그래서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는 줄 아는 초등학생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멘붕을 달래려 간만에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봤다. 검색창에 “예물 1000만 원”이라고 쳤더니 “1000만원대 알뜰한 예물구성”이라는 홍보글이 뜬다. ‘알뜰한’……. 술 깨자마자 다시 멘붕. 이번에는 “스튜디오 촬영 200만 원”이라고 쳐봤더니 “강남에서 그 정도면 손해는 안 보고 하셨네요”라는 답변글이 뜬다. 엎친 멘붕에 덮친 멘붕. 빠져나갈 길 없는 3D입체멘붕이다.


내 친구들이 엄청 ‘잘나가는’ 놈들이라서 엄청 ‘잘나가는’ 결혼을 하느라 그런 거라는 결론이 나오기를 바랐는데, 대한민국의 ‘보통 부부’들이 ‘보통 결혼’을 하려면 다 그 정도는 한다는 소리 아닌가. 내 이름으로 된 재산이라고는 5000만 원짜리 전세방 한 칸이 전부인 내가 ‘그래도 전세자금대출 천만 원쯤 받아서 전셋집 하나만 구하면 결혼은 하겠지’ 하고 생각했으니……. 이래서야 ‘보통 결혼’도 꿈도 못 꿀 지경 아닌가.


검색질을 좀 더 해보니 2012년 현재 평균 결혼 비용이 1억7000만 원대란다. 한 달에 200만 원 겨우 버는 내가 밥 한 술 안 먹고 숨만 쉬고 살면 85개월, 꼬박 7년 하고도 한 달을 더 모아야 하는 돈이다. 대졸 대기업 신입사원의 평균 초봉이 340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는데, 걔네들도 5년을 꼬박 모아야 한다. 혹시나 최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신세라면 2012년 기준 월급 97만 원을 후하게 100만 원이라 쳐줘도, 14년 3개월 동안 김치도 안 먹고 숨만 쉬고 돈만 벌어야 한다. 오직 ‘보통 결혼’을 하기 위해서!


둘레에서 결혼을 한다는 이를 보면 정말 축하하고 존경(?)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1억7000만 원짜리 ‘보통 결혼’을 한다면 숨만 쉬고 돈만 벌고 살았을 그의 5~14년 세월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리고 보통도 안 되는 결혼을 한다면 ‘이런 거 저런 거 하지 말자’ 신부와 부모님을 설득하고, “보통 이 정도는 다 하시는데요” 하고 들이대는 웨딩업체에 당당히 ‘싸구려’ 손님이 된 그의 협상력과 뱃심에 박수를 쳐줘야 한다.


“스튜디오 촬영 200만 원”을 검색했을 때 찾은 또 하나의 글. “스튜디오 촬영보조 구함. 월급 200만 원”이라는 제목의 구인광고. 딴에는 돈을 많이 준다고 제목에 당당히 밝혀놨다. 200만 원짜리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의 월급이 200만 원이라……. 햄버거 가게 알바가 자기 시급으로 햄버거 하나 못 사먹는다는 기사를 봤을 때만큼이나 허탈하고 화가 난다. 젊은이들을 이렇게 괴롭혀서 잘 먹고 잘사는 양반들은 대체 누군가.


아무리 소비를 통해 자존을 확인한다는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이건 너무 잔혹하다. 나는 ‘보통 결혼’을 하자니 7년 동안 밥도 김치도 안 먹고 살 자신은 없고, 그나마 ‘반값 결혼’이라도 하려면 협상력과 뱃심이나 열심히 키워야겠다. 대한민국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기, 너무 힘들다. 에휴.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