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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2층의 가인(佳人)'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2. 8. 3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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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2층의 가인(佳人)’



  “임프가 없어지다니ㅠ.ㅠ”


  대학 후배의 카카오톡 대화명이 이렇게 바뀐 걸 보고 깜짝 놀라 말을 걸었다. 정말로 그 ‘임프(imp)’가 없어졌느냐고. ‘막걸리대학교’라는 별명이 유명했던 우리 학교. “아~ ○○대학교 막걸리대학교~ 막걸리를 마셔도 ○대답게 마셔라” 하는 가사의 <막거리 찬가>가 있을 정도로 학교의 분위기는 술과 ‘마초스러움’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학교 앞 유흥가에 독보적으로 자리 잡은 커피숍이 있었느니, 그곳이 ‘임프’였다.


  등받이가 높고 쿠션이 좋은 소파가 있던 곳. 좀 신경 써서 만나야 할 이성이 있다면 누구나 그곳을 애용했다. 아니, 골목골목 술집뿐이었으니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남녀가 술이 떡이 돼서 새벽에 막걸리집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나온다면 아무도 그들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지만, 대낮에 임프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이 목격된다면 그 소식은 곧 열애설로 날개를 달고 퍼져나가곤 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2001년 당시에도 이미 1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던 그곳. 20여 년 세월 동안 대학생들의 “공사장(우리는 ‘연애작업’을 ‘삽질’이라 했다)”으로 명성을 떨쳐온 그곳도,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의 전방위 압박에는 당해내지 못했나 보다. 후배의 대답을 통해 임프의 종말을 거듭 확인하고서, 나 역시 한 시절 그곳에서 삽질에 전념했던 사람으로서 깊은 애도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1년쯤 전,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애도를 느낀 날을 떠올렸다. ‘2층의 가인(佳人)’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그날. 같은 서울이지만 학교는 동북쪽 성북구, 직장은 서북쪽 마포구. 졸업을 하고 자취방까지 회사 앞으로 이사를 한 뒤에는 학교 앞을 찾아갈 날도 거의 없었다. 모처럼 대학 시절 친구들을 만나 ‘그 시절처럼’ 제기시장 감자탕집에서 뼈다귀를 뜯고 소주를 마시고 나서, 마치 김유신의 말이 천관녀의 집을 찾아가듯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끌려간 그곳. 하지만 ‘가인’ 호프의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술 취한 이들이 한번씩 구르기도 했던 가파른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노란 불빛과 검은 그림자로만 구분되는 가게가 나왔다. 선배의 선배의 선배의 선배 때부터 드나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지만, 얼마나 오래된 가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끔 새벽 두세 시쯤, 신자유주의 정권이 어떻고 학생회 노선이 어떻고 하는 얘기를 핏대 세워가며 할 때면, 옆 자리에 앉은 양복쟁이 아저씨들이 선배라면서, 열심히 사는 후배들 보니 반갑다며 술값을 대신 내주고 사라지기도 했다.


  어두컴컴한 가게 안에는 <레옹>이나 <그랑브루> 따위의 영화 포스터들이 내키는 대로 걸려 있었고, 술값이 싸다는 학교 앞 시장 골목에서도 다른 가게보다 맥주 3000시시에 1000원은 더 쌌다. 그 돈마저 없을 때는 언제든 ‘가리(외상)’가 가능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아득한 공간을 채우던 김광석의 노래. 시디가 한두 번 돌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다가, 가끔은 온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한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돈은 없는데 할 말은 많고, 가슴은 뜨거운데 쏟아낼 곳은 없는 청춘들에게 그곳은 일종의 해방구였다.


  ‘1차’에는 거의 가지 않지만 맨 정신이 별로 남아 있지 않는 때가 되면 늘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또 ‘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가게 이름과 같이 아리따운 ‘누님’이었다. 그분의 나이는 아무도 몰랐다. 설사 실제 나이는 이모에 가까웠다 치더라도, 그분의 절대적인 미모는 모두가 그분을 누님이라 부르게 했다. 도도한 외모로, 뜻밖의 살가운 부산 사투리를 쓰던 누님. 김광석의 노래와는 살짝 어울리지 않는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분에게서는 역한 화장품 냄새보다, 정말 큰누님 같은 포근함이 먼저 느껴졌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한 2006년. 비싼 등록금에 생활비까지 받을 면목이 없던 나는 파트타임 학원강사 아르바이트를 했다. 꼴 같지 않게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하루에서 대여섯 시간씩 수업을 해야 했다. 오전에는 대학 강의를 듣고, 오후 서너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저녁 시간은커녕 쉬는 시간도 없이 수업을 했다. 논술이 뭔지도 모르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생까지 억지로 앉혀놓고 서-본-결이 어떻고 미괄식 구성이 어떻고 하는 얘기를 쏟아내고 나면, 퇴근길에는 그야말로 소금에 절인 배추 같은 상태가 되기 일쑤였다.


  집에 간다고 밥 차려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를 하나, 버스에서 내려 가인 옆 건물에 있는 분식점에서 라면을 시켜 먹고 있을 때였다. 맛도 모르고 꾸역꾸역 배만 채우고 있을 때 ‘누님’이 내 앞에 나타났다. 누님도 야식을 드시려는 모양인지, 분식점 아주머니가 미리 차려둔 음식을 한 쟁반 들고 올라가려다 나를 본 것이다. 양복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취직을 했냐고 묻는 누님에게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분이 하신 말씀에, 나는 순간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 하고 올라와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했다.


  “장정이 하루 종일 일하고 라면 하나 가지고 끼니가 되겠나. 내가 시켜주께, 떡볶이도 묵고 순대도 무라. 아줌마, 이 학생 묵고 싶다는 걸로 다 주시고 제 꺼하고 같이 달아놔 주이소.”


  때가 되니 복학은 했는데,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던 때였다. 집안 살림은 빤한데 나이 먹고 손 벌리는 짓도 못하겠고. 다른 동기들은 어학연수다 토익이다 바빴지만, 나는 그렇게 살 자신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오전에는 강의를 몰아서 듣고 오후에는 한 달에 100만 원도 안 되는 돈이라도 벌겠다고 숨차게 뛰던 때였다. 하루 종일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 한 마디 못 나누고 지나가는 날이 태반이었는데, 그날 분식점에서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누님에게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누님의 분부(?)에도 나는 다른 음식은 시켜먹지 않고 라면만 한 그릇 먹고 나왔다. 물론 내 돈으로. 하지만 배보다는 가슴이 가득 차서 배고픔도 서글픔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도 이제는 다 혼자만 간직한 추억이 돼버렸다. 그때 분식점에서 나를 만난 일을 기억하시냐고 물어볼 기회도 이제는 없다. 언제나 하는 똑같은 변명이지만, ‘먹고살기 바빠서’ 그냥 또 잊고 지내다 이제사 한숨을 쉴 뿐. ‘2층의 누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어디다 더 번듯한 가게를 차리고 여전히 김광석의 노래를 틀며, 또 어느 배고픈 청춘에게 떡볶이 한 그릇의 인정을 베풀고 계실까. 아니면 제기시장에 떠돌던 ‘재개발’ 바람에 휩쓸려 가게도 넘기고 어느 삼겹살집의 ‘차림사 아줌마’가 된 것일까.


  이제 월급 제때 나오는 직장 다니면서 먹고살 만해졌는데, 나는 왜 그곳에 가서 맥주 한잔 마시면서 ‘고마웠습니다’ 한마디 하지도 못했을까……. 후회는 언제나 한 발짝씩 늦고, 세월은 오늘도 모질게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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