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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건강을 좀 챙기겠다고 밀가루 음식을 끊고 산 적이 있다. 빵이나 과자, 떡볶이 같은 것들은 먹지 않고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지만, 결국 나를 무릎 꿇린 음식은 바로 ‘면(麵)’이었다.
출출한 밤 계란 하나 풀어서 김치쪽과 함께 먹는 라면의 맛, 비 오는 날 바지락 푸짐하게 넣고 뜨끈하게 먹는 칼국수의 맛, 더운 날 입맛 없을 때 소면에 열무김치만 얹어서 고추장으로 쓱쓱 비벼먹는 비빔국수의 맛.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 ‘섹시한’ 맛 때문에 나는 한 6개월 만에 다시 밀가루 음식에 손을 대고 말았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국수를 후루룩 소리를 내서 먹는 이유는 입술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라며 “국수는 입술 자극 음식”이라고 국수의 매력을 평가했다. 저렴하면서도 건강하고, 간편하면서도 다양하게 응용이 가능한 매력 덕분에 국수는 3천 년의 역사 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사랑을 받아왔다.
파스타와 라면 등으로 모습을 달리해오며 오늘도 우리의 입을 행복하게 하는 이 매끈하고 쫄깃한 것들. 이것들은 대체 언제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3천 년의 시간 동안 이 면발 속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차지게 스며들었을까. 알고 먹으면 더 맛있는 ‘면(麵)의 세계’ 속으로 책과 함께 들어가 보자.
[라면]
국수가 얼마나 더 진화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라면이야말로 면류의 최강자다. 일본 최초의 라면은 19세기 말 일본으로 이주한 중국인들이 만들어 먹었던 ’난징 소바’를 일본식으로 변형한 것이었다. <라면이란 무엇인가>는 라면의 유래부터 면과 각종 육수 만드는 법, 맛집 정보와 인스턴트 라면까지 일본 라면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라면 요리왕> 등 라면 관련 만화만 10여 편을 그려온 저자 가와이 단은 다년간의 라면 만화 연재 경험과 일본 전국의 유명 라면 가게에 대한 취재를 통해 이 책을 완성했다.
일본에서 탄생한 라면이 한국에 건너온 때는 1963년. 삼양식품이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 ‘삼양라면’을 출시한 때다. 이후로 한국은 명실상부한 ‘라면 대국’이 됐다. 1인당 연간 라면 소비량은 74개로 세계 1위, 국내 라면 시장 규모는 약 2조 원이다. 무라야마 도시오가 쓴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은 한국 삼양식품 회장 전중윤과 일본 묘조식품 오쿠이 키요즈미의 라면 기술 전수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와 함께 자료 조사를 위한 인터뷰와 사진촬영에 동행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라면 값이 싸다고 라면이 가지고 있는 문화사적 가치까지 그렇게 무시하면 정말 안 되는 거다”라고 이 책을 추천했다.
[파스타]
동양에서는 국수, 서양에서는 파스타다. 오랜 세월 사랑받은 음식은 그 음식을 만들고 먹어온 사람들의 역사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파스타처럼 음식의 역사가 그 사회의 역사와 완벽하게 맞물려온 경우는 드물다.<파스타로 맛보는 후룩후룩 이탈리아 역사>는 제목 그대로 파스타에 담긴 이탈리아의 역사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인 도쿄대 교수 이케가미 슌이치는 오랫동안 열강의 지배 아래 조각나 있다가 마침내 통일을 이룬 이탈리아의 역사와, 지방마다 세분된 명물이자 이탈리아인을 하나로 모으는 국민 음식인 파스타의 역사가 맞닿아 있는 지점들을 절묘하게 포착해 차근차근 풀어냈다.
[냉면]
한반도 남쪽 지역에서는 국수 하면 주로 밀가루 국수를 떠올리지만, 북쪽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냉면’을 먼저 떠올린다. 조선시대 문신 장유가 "젓가락을 입에 넣으니 맛이 입속에서 살아나고 옷을 더 입어야 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뚫는다"라고 표현한 냉면의 맛. 수백 년 전부터 한국인들은 냉면을 사랑해왔다.<냉면열전>은 한국인의 ‘소울푸드’인 냉면의 역사와 그 속에 담긴 한국인의 정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2013년 8월 방영된 MBC 다큐스페셜 ‘냉면’을 연출한 저자 백헌석은 다큐멘터리 내용을 기초로, 고려-조선시대 문헌부터 1920~19030년대 잡지까지 다채롭고 깊이 있는 자료를 더해 책을 완성했다.
[국수]
국수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로, 이욱정 PD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누들로드’ 시리즈(2009년)가 있다. 같은 제목의 책으로도 출판됐지만 지금은 절판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음식 칼럼니스트 박정배가 쓴 <음식강산 2 - 국수는 행복의 음식이다>는 그런 아쉬움을 달래줄 만한 책이다. 저자는 2년간 전국을 누비는 식행(食行)을 통해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국수를 찾아냈다. 한국 소면문화의 살아 있는 역사가 된 부산 구포국수, 척박한 땅에 잘 자라는 메밀을 화전민들이 국수로 만들어 먹은 것이 발전한 강원도 막국수, 돼지고기와 몸국의 국물문화가 만들어낸 제주 고기국수 등 아홉 가지 국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한편 <어이없게도 국수>는 조금 더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의 국수 이야기이다. “혈관 속에 냉면 육수가 흐르는 진정한 모태 면식수행자”를 자처하는 저자가 국수를 먹으며 타인과 나눈 정(情),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소중한 순간들이 29개의 에피소드 속에 담겨 있다. 국수를 좋아하고, 국수를 함께 먹으며 마음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억과 공감을 이끌어낼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