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놀기만 한 건 아니란다
[얼렁뚱땅 아빠 되기 1]
아내한테 새로운 별명을 지어줬다. 곰돌이. 이제 아내의 배는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너비가 비슷하다.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진짜 곰돌이가 앉아 있는 것 같다. 서서 걸을 때도 꼭 서커스 곰이 걷는 것처럼 아장아장 뒤뚱뒤뚱. 그럴 때는 가끔 “곰돌이, 사람처럼 두 발로도 잘 걷네” 하고 놀려줘야 제 맛이다. 아내는 지금 만 임신 7개월, 아내의 몸속에 내 아이 ‘홈런이’가 자라고 있다.
앞으로 두 달 반만 지나면 홈런이가 태어난다. 당연히 아직 실감이 안 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순간 아내의 배가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열심히 노는 홈런이를 봐도 아직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아빠가 된다는 건 어떤 걸까. 비록 아내 배 속에 있지만 홈런이는 이미 엄연한 생명으로 자라 있는데, 나는 그런 홈런이의 아빠가 되기 위해 지금 무엇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돌이켜본다.
그래서 ‘아빠’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나를 성찰하기 위해 이 글을 쓰기로 했다……고 하면 솔직히 좀 ‘오바’다. 물론 나름대로 그런 진지한 까닭도 조금 있긴 하지만,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진짜 까닭은 ‘아내한테 지지 않기 위해서’다. 유치하다 말해도 어쩔 수 없다. 홈런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세월은 늘 모질게도 빨리 흐르기 마련. 내가 걱정하는 때는 홈런이가 글을 읽기 시작할 때다.
아내한테 ‘엄마 되기’ 일기를 쓰라고 한 것은 나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내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게 됐다. 신체적, 정신적, 환경적 변화가 집에서 혼자 보낼 ‘아내의 하루’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걱정이 된 나는 아내한테 글로 마음을 다스려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해서 쓰기 시작한 아내의 ‘엄마 되기 일기’. 아내는 어느덧 신문에 자신의 연재 꼭지까지 있는 ‘작가님’이 됐다.
바로 그 때문이다. 아내가 ‘엄마 되기’를 준비하며 보낸 하루하루를 기록한 글! 처음에는 아내가 참 기특해서 동네방네 자랑도 했지만, 막상 홈런이가 태어날 날이 코앞에 다가오니 돌연 불안해지기 시작한 거다. 나중에 홈런이가 커서 아내의 글을 읽고 “엄마는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글도 쓰고 나를 기다렸는데, 아빠는 그동안 뭘 한 거야?” 하면 어떡하나. 나만 너무 얼렁뚱땅 살아온 걸 눈치라도 채면 어떡할까!
기록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 홈런이를 맞이하기 위한 나의 노력(얼마 안 되기에 그만큼 더욱 소중한)은 누가 기록할 것인가. 아내의 글에 가뭄에 콩 나듯 기록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아내의 기억과 주관에 의해 해석된 역사! 홈런이에게 균형 잡힌 우리 가족의 역사를 전하기 위해(아 이건 좀 심했나?), 나중에 “아빠도 놀지 않고 열심히 준비하고 글도 썼어!”라고 항변하기 위해, 나는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지난 5개월(임신 2개월 때 임신 사실을 알았다)을 돌아보니 정말 한 게 별로 없긴 하다. 내 입장은 언제나 ‘아내의 방침에 대한 배타적 지지’였다. 이게 좋게 생각하면 ‘전적인 신뢰’지만 나쁘게 생각하면 ‘난 몰라, 당신이 알아서 해’가 될 수도 있는 거다. 다행히 아내는 아직 전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솔직히 내 속을 들여다보면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했던 것 같다.
임신 검사를 보건소에서 받을지 병원에서 받을지도 아내가 결정했다. 홈런이를 병원에서 낳을지 조산원에서 낳을지도 아내가 결정했다. 홈런이를 위해 어떤 수업을 어디에 가서 듣고 어떤 옷과 장난감을 무엇으로 만들지도 모두 아내가 고민하고 아내가 공부하고 아내가 결정했다. 아내가 독재자처럼 혼자 결정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내는 늘 그날그날 자신이 고민하고 공부한 것들을 꼬박꼬박 나한테 이야기한다.
아내는 정말 열심이다. 고민도 열심, 공부도 열심, 나한테 그것들을 설명하고 내 생각을 묻는 것도 열심이다. 나는 늘 “그래 자기 뜻대로 해” 하고 대답한다. 나는 잘 ‘모르니까’, 아내가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으니까 아내의 결정을 믿어주는 것이 최고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반성이 된다. 그럼 나는 아내가 던진 물음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보려’ 노력했는가.
나도 모르게 출산과 육아에 굉장히 소극적인 사람이 돼버렸다. 아내는 밥을 먹어도 홈런이를 위해 먹고, 책을 읽어도 홈런이를 위해 읽고, 음악을 들어도 홈런이를 위해 듣는다. 하루 종일 홈런이의 건강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나는 그냥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집에 와서는 아내의 말에 무조건 ‘예스’만 하면서 저녁상 치우기나 돕는 것으로 그럭저럭 잘하고 있다 생각한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같잖은 가부장의식(?)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밖에서 열심히 돈을 벌고 아내와 홈런이를 위해 희생하니까 아내는 알아서 열심히 홈런이를 키우고 낳고 집에서 내가 편히 쉴 수 있게 나를 배려해줘야 한다는 생각. 실제로 내 행동이 옛날 아버지들처럼 ‘왕’ 대접을 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해도, 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반성부터 좀 하게 됐는데, 나름대로 잘해온 것도 있다. 내 입으로 이런 얘기 하기는 참 낯간지럽지만, 내가 제일 잘한 것은 ‘찰싹 달라붙어 있기’다. 한번씩 농담으로 아내한테 “자기 직업은 이제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있기’야” 하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잘 달라붙어 있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내는 내 오른쪽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책을 읽고 있다.
결혼 전에는 공사가 다망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나다. 일 끝나고 와서도 집에 가만히 있으면 괜히 ‘별로 안 부지런한 사람’ 같아서, 일주일 내내 모임에 나가고 회의를 잡고 술도 마시며 필요 이상으로 바쁘게 살았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특히 아내가 홈런이를 갖고 직장을 그만둔 뒤로는 일단 퇴근하고 나면 무조건 집으로 바로 와서 아내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정말 피할 수 없는 회의 같은 것(이를테면 <삶이보이는창> 기획회의!)이 아니면 퇴근 이후 약속은 잡지도 않는다. 집에 오면 밥을 먹든 텔레비전을 보든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무조건 아내의 곁에 ‘살을 대고’(이게 중요한 거다) 붙어 있는다. 까닭은 단순하다. 일을 그만둔 뒤로 아내는 하루 종일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셈이 돼버렸다. 그런 아내한테 최대한 나를 많이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다.
또 하나, ‘돈 들이고 유난 떠는 태교가 좋은 게 아니고 임신부의 마음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태교’라고 아내가 말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마음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 뭐가 있을까? 아직까지는(시간이 지나면 또 변한다고 하더군. 세상 사람들의 말을 다 믿진 않지만. 흥.) 뭘 하든 내가 옆에 찰싹 붙어 있어주는 걸 최고로 편안해하고 행복해하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오늘, 잘한 거 또 하나 있다. 오늘 부동산에 집을 내놨다. 아내와 홈런이가 조금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으로 이사 가기로 했다. 지금 사는 곳도 우리 세 식구가 살기에 크게 부족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넓고 깨끗하고 안전한 집, 특히 아내가 홈런이를 데리고 편하게 운동도 하고 이웃들도 사귈 수 있을 만한 곳으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이사를 하면 내 출근 시간은 평균 20분이 늘어난다. 지금 50분에서 1시간 10분으로. 솔직히 지금 하루에 버스를 왕복 1시간 40분씩 타는 것도 힘들다. 이사를 하고 하루에 2시간 20분씩 버스를 탈 생각을 하면 솔직히 걱정도 되지만, 우리 형편에 구하기 힘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딱 하루 고민하고 결정했다. 내 이런 우국충정(?)을 아내가 또 고마워해주니 조금 뿌듯하기도 하다.
다음 달부터는 아내와 함께 조산원에서 ‘출산준비교실’ 수업을 듣기로 했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짧은 수업이지만 열심히 들어야겠다. 지금까지 ‘눈에 띄게’ 잘한 게 딱히 없으니 이런 거라도 열심히 듣고 수료증(?)이라도 받아놔야 나도 마냥 놀지는 않았다는 게 입증되지 않겠나. 홈런아, 아빠도 이제 나름 열심히 준비할 거야. 그러니 나중에 엄마만 고마워하고 좋아해서는 안 돼. 알았지?
* <삶이보이는창>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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