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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학생회실·지하방... 내 집 찾기 '흑역사'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3. 12. 22.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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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부서 후배 기자 김털보가 요즘 집을 구하느라 골치가 좀 썩나보다. 월세 계약 끝나는 날은 두 달 앞으로 다가왔고 결혼까지 생각하면 지금보다 넓은 집을 구해야 하는데,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서울의 집값에 매일 쇼크만 먹고 있는 모양이다. 남 일 같지가 않다. 나도 'in서울'을 포기하고 부천에 신혼집을 구할 생각을 못했다면 지금 같은 전셋집조차 꿈도 못 꿨을 거다.


일은 서울에서 하는데 잠은 서울에서 못 잔다. 빌라 전세도 1억쯤 없으면 꿈 못 꾸고. 서울 외곽으로 나가 살자니 출퇴근이 고행이요, 아예 다른 도시로 뜨자니 해먹고 살 일이 없는 진퇴양난. 지금 우리 집은 서울이 아닌 부천이지만 그나마 전세로 구했으니 월세 아끼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돌이켜보니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온 뒤로 아홉 번째 마련한 보금자리다. 하아, 십 년 남짓 전인데도 훨씬 더 오래된듯 까마득하다.  


스무 살 나의 독립 첫 해. 서울에 마련한 나의 첫 거처는 대학 기숙사였다. 엄마는 엄청 좋아했다. 싸니까. 하지만 난 별로였다. 처음 보는 2층 침대는 신기했지만, 빌어먹을 통금이 있는 것도 짜증났고 게임에 빠져 사는 공대생 방장이랑 사사건건 부딪히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한 학기 만에 자진 퇴거. 그때 난 너무 ‘후리’했고 너무 겁이 없었다. 그냥 얌전히 디아블로나 배우면서 붙어 있는 거였는데.


기숙사를 뛰쳐나와 들어간 곳은 고시원. 한 달 방값이 15만 원이었다. 창문이 있는 방이라, 창문 없는 방보다 5만 원 비쌌다. 하지만 반투명 밀폐 유리창. 빛은 ‘은근히’ 들어오지만 밖은 볼 수 없었고, 창을 열 수 없으니 바람도 통하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면 할 게 없었다. 방의 절반은 침대(무슨 야전병원 침대 같은 초슬림 싱글 사이즈), 나머지의 절반은 책상과 의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고, 할 거라고는 자거나 책 읽는 것뿐. <0.75평 지상에서 가장 작은 내 방 하나>라는 양심수 수기를 어찌나 공감하며 읽었던지, 지금도 저 긴 제목이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기억날 정도다. 결국 나중에는 그 방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다. 친구네 집을 전전하며 며칠을 살다가, 내 방에 잠깐 ‘들러’ 옷이나 갈아입고 나오는 유랑민이 된 것이다.


몇 달 못 가서 고시원에서 나왔다. 고향집에서 자취방 얻을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어디로 가야 할까. 그 흔한 수학 과외도 할 줄 몰라서 돈 나올 구멍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막막한 때였다. 결국 보다못한 선배들이 졸업한 직장인 선배의 집에 더부살이를 알선(?)해줬다. 은행에 다니던 선배. 내가 눈 뜨기 전에 출근하고 내가 한잔 마시고 취해서 집에 들어오면 이미 들어와서 자고 있었다. 일곱 살쯤 많았던 것 같은데 그때 고맙다는 인사는 잘 하고 살았는가 모르겠다. 세훈이 형, 정말 고마웠어요.


언제, 무슨 이유로 그 집에서 나왔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 뒤로 다른 선배네 집에 얹혀살기도 했고 학생회관에 있는 생활방에서 살기도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총학생회실 옆에 있는 방 하나를 생활방으로 썼다. 학생운동을 하다 수배를 당해 학교 밖으로 못 나가는 수배자 형들도 거기서 자고, 집에 잘 못 들어가는 학생회 간부들도 거기서 잤다. 가끔 술 마시고 실신(?)한 친구가 있으면 거기다 ‘처분’하기도 했고.


나와 한 학번 위인 선배 하나는 짐은 다른 데 맡겨두고 잠만 그 생활방에서 껴 자면서 얼마간 지냈다. 아마 대학교 2학년 말이었던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가난했던 시기.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은 많았고 돈은 없었다. 과외로 돈 버는 건 학벌 내세워 사기 치는 것 같아 싫었고(그때만 그랬다. 나중에는 학원까지 뛰면서 바짝 번 적도 있음), 하루에 컵라면 하나 먹는 날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불행하다는 생각은 안 했다. 여담이지만, 그때 나랑 학생회관에서 같이 산 선배가 나중에 내 아내를 소개해줬다. 멀때형, 형도 고마워요.


그러다 3학년 여름에 다시 혼자 살게 됐다. 고시원 생활 이후로 한 2년 만에 혼자 살게 된 것. 반지하 월세방이었는데, 원래 큰 방을 얇은 합판(내 느낌에는 그랬다)으로 나눠서 여러 학생들한테 세를 놓은 집이었다. 거기서 석 달 정도 있었나? 입대 신청을 해놓고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라 그 정도 방값은 낼 수 있었나 보다. 2학기가 끝나기 전에 군대 간다고 방을 빼겠다 하자 주인아줌마가 “학기 중에는 들어오겠다는 학생이 없는데, 방을 놀려야 돼서 너 때문에 손해가 크다” 하며 구박하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역하고 스물다섯에 복학하면서는 수준(?)이 좀 올라갔다. 그사이 작은누나가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누나랑 같이 방 두 개 있는 벽돌집 1층에서 살게 됐다. 지은 지 30년쯤 됐을까. 재개발지구에 있어서, 시골에서나 볼 법한 구멍가게도 있고 고물상도 있고 꽤 신기한 동네였다. 하지만 집이 너무 추웠다. 빨간 벽돌로 쌓은 집. 가스 아끼려고 보일러도 마음껏 못 틀고, 골목 쪽으로 붙은 방에서는 낮에도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저녁에 들어가면 바퀴벌레 두세 마리는 꼭 잡고 자야 했다는 것도 잊을 수 없다. 


누나가 결혼을 해 떠나고 혼자서 더 살다가 스물아홉에 합정동으로 옮겼다. 내 직장 근처에 있는 지하 원룸. 정말 잊지 못할 곳이다. 그 동네에서 구할 수 있는 제일 싼 방. 2년 동안 그 방에서 살면서 두 번의 물난리를 겪었다. 비 때문에 겪은 것이 아니라 내 방 옆에 있던 지하 기계실이 고장 나서 물이 넘쳐 그런 것이었다. 밤에 잠을 자다가 머리맡이 축축해서 일어났더니, 이미 방바닥에는 물이 흥건했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때 알았다. 수건이며 걸레며 헌 옷이며 몽땅 꺼내 방바닥의 물을 닦아서 짜내고 또 닦아내고. 아침이 되고 사람을 부를 수 있게 될 때까지 정말 처절한 시간을 보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나. 그해 추석에는 고향집에 내려가 있다가, 우리 동네에 물난리가 났다는 뉴스를 보고 혼자 부리나케 올라오기도 했다. 집은 무사했지만 이미 나는 너무 비참해졌고.


차라리 옥탑방으로 가자고 진작에 방을 내놨지만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2년을 꼬박 채워 살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드디어 ‘땅 위의 집’을 얻을 수 있게 됐을 때, 무조건 높은 집으로 가겠다 마음먹었다. 4층 원룸 건물의 4층 방. 누구는 꼭대기 층이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고 걱정했지만, 그런 것쯤 괜찮았다. 물은 하늘로 흐르지는 못하는 법, 지하의 악몽을 떨쳐버릴 수 있을 만큼 높은 곳이어야 했다.


거기서 한 해를 다 살기도 전에 결혼을 하고 지금의 신혼집으로 옮겼다. 지금도 5층 건물 중 5층이다. ‘낮은 곳’에 대한 거부감이 본능처럼 몸에 새겨진 것일까. 이 집이라고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없지는 않지만 옛 집들에 비하면 나한테는 궁궐 같은 집이다. 요즘 가끔 내년에 전세 계약이 끝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에 빠지고는 한다. 홈런이가 태어나서 식구가 하나 더 늘면 확실히 집이 좀 좁아질 거고, 아이와 아내가 살기에 조금 더 안전하고 편한 곳에 살고 싶다는 바람도 생겼기 때문이다.


얼마 전 큰누나가 아파트에서 단독주택 독채를 사서 이사했는데 어떤 집인지 참 궁금하다. 나는 언제쯤 그런 집 사서 마당도 가꾸고 집 안도 꾸미면서 살아보나 부럽기도 하고, 적어도 서울 근처에 살면서는 그런 날이 올 리가 없을 것 같아 착잡하기도 하다. 그나저나 김털보 기자의 고민은 어떻게 결론 나려나. 우리 월급에 대출이자 주고 월세까지 주면 고기반찬은 영영 못 먹을 거야. 그냥 서울 포기하고 우리 동네로 와. 이웃사촌끼리 아등바등 살아보자꾸나. 흑.



* <난지도 파소도블레>(blog.daum.net/nanpaso) 2013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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