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 ‘부천시 시정메모’라는 전자우편이 한 통 왔습니다. 사실 대개 그런 류(?)의 전자우편은 열어보지 않고 그냥 삭제하는데요, 이번에는 안 열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바로 전자우편의 제목이 “부천시 뉴타운 지구 지정 해제하기로 했습니다”였기 때문입니다.
부천에는 세 곳의 뉴타운 지구가 있습니다. 원미지구, 소사지구, 고강지구. 저희 집이 바로 고강지구에 있습니다. 지난해에 이곳으로 이사 올 때부터 사실 기분이 별로 안 좋았거든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라 서울로 출퇴근해야 하는 저는 어쩔 수 없이 이 동네를 택해야 했습니다만, 뉴타운, 아니 ‘재개발’ 지구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특히 내년에 전세계약이 끝나는데, 계속 이 동네에 살아도 좋을지 아니면 서울에서 조금 더 먼 다른 동네로 옮겨야 할지 고민이 됐습니다.
일단 이번에 뉴타운 지구에서 지정 해제되는 곳은 원미지구와 소사지구입니다. 부천시는 그 두 지구 가운데 지정 해제 또는 해제신청 상태인 구역이 각각 60%와 42%에 이르러서, 지구 전체의 뉴타운 개발 자체가 어렵다 판단됐다고 밝혔습니다. 고강지구는 아직 지정 해제가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달 중 추정분담금 공개 이후 내년 하반기에 지정 해제를 검토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물론 다행이라고 해서, 뉴타운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뉴타운 반대’가 무조건 옳은 것이라는 말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동안 ‘뉴타운 = 벼락부자’라는 생각이 사람들을 지배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민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재개발 여부’가 결정된 것입니다.
재개발을 통해 주민 모두의 주거의 질이 높아진다면 누가 반대할까요. 하지만 그동안 ‘재개발’ 하면 반드시 따라온 것이 바로 ‘철거민’이었습니다. 헌 집을 부수고 새 집을 짓는 것이 재개발인데, 헌 집에서 쫓겨나기만 하고 새 집에는 들어갈 수 없는 철거민들이 생겨났습니다. 돈이 있는 집주인들은 새 집을 가지고 벼락부자가 됐을지 모르겠지만, 가난한 세입자들은 철거민 신세가 돼서 더 가난한 동네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재개발 대신 뉴타운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있는 사람은 벼락부자가 되고 없는 사람은 집 한 칸마저 빼앗기는 재개발의 어두운 그림자를 가리기 위해, 뉴타운이라는 ‘희망에 가득 찬’ 말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뉴타운이라는 말은 곧 중산층들의 졸렬한 탐욕을 상징하는 말이 됐습니다. 정치인들은 그들의 표를 얻기 위해 이 나라 구석구석에 뉴타운 지구라는 선을 무작정 그어댔고, 국민들은 ‘뉴타운만 되면 한 방에 부자 된다’ 하는 욕심에 마구 표를 몰아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자가 됐나요?
서로 자기 동네를 뉴타운으로 지정해달라고 아우성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지정을 해제해달라고 합니다. 아파트를 짓기만 하면 무조건 팔리고 집을 사두기만 하면 무조건 값이 오르는 때가 아니기 때문이죠. 더 이상 ‘뉴타운 개발만 하면 동네가 살고 모두 떼돈 번다’ 하는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 헌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은 새 집에 들어가려면, 집 있는 사람들도 대출을 얻고 빚을 내야만 한다는 것을, 세입자들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덜 부유한’ 집주인들 역시 불행해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거기다 이제는 하나를 더 알았으면 합니다. 누군가의 불행을 감수하며 자신의 행복을 좇는 것은 도둑질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요. 집을 잃고 내쫓기는 사람이 있든 없든 내 집 가격만 뛰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비열한 범죄에 다름 아니라는 것도요. 이제는 뉴타운의 환상과 함께 ‘벼락부자’에 대한 탐욕도 떨쳐버렸으면 합니다. 나와 이웃이 모두 행복해지는 마을로, 우리 동네가 하루 빨리 ‘재개발’되기를 바라겠습니다.
* <리얼리스트100>(www.realist.kr) 2013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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