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야구를 좋아합니다. 27일은 한 해 프로야구의 결승전 격인 한국시리즈의 세 번째 경기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저도 경기 시간인 오후 2시가 조금 넘어서 중계방송을 틀었습니다. 초반에는 점수도 잘 안 나고 나른한 일요일 오후라 눈이 살짝 감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카메라가 관중석에 앉은 누군가를 비췄습니다. 저는 제 눈을 의심하며 아내한테 물었습니다. “저기, 저기 지금 박근혜야?” 두 번째 나올 때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활짝 웃는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을.
정말 기분이 나빴습니다. 왜 하필 한국시리즈 경기에 나타났는지 막 따지고 싶었습니다. 야구팬들에게는 1년 중 가장 큰 축제의 자리입니다. 1년 내내 최고의 플레이를 한 두 팀이 맞붙어서 자웅을 겨루는 긴장되고 집중해야 할 야구의 ‘최종전’입니다. 그런 자리에 정치인이, 그것도 대통령이 얼굴 좀 팔아보겠다고 요란하게 와 앉아 있는 꼴이라니!
경기 중반쯤 박 대통령은 먼저 자리를 뜨더군요. 중간 중간 관중들과 악수를 하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때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보니 그날 경기의 시구까지 했다고 하더군요. 프로야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3S(스포츠, 섹스, 스크린)’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었다는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자동으로 1982년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시구를 한 전 전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정치의 도구로 다시금 전락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야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면, 정말 한 사람의 야구팬으로서 야구를 즐기러 온 것이었다면, 조용히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면 그만입니다. 일반석에서 보려면 경호 문제 때문에 시민 관중들에게 민폐를 많이 끼칠 테니, VIP석으로 가주는 것이 차라리 고맙죠. 인사를 하고 싶거든 적당한 때에 손이나 한번 흔들어주면 그만입니다. 중계 카메라도 그때 한 번 정도 비춰주는 것이면 족하죠.
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야구 국가대표 모자에, ‘Korean Series’라 적힌 후드 티셔츠, 태극기가 박힌 글러브. 누가 보더라도 ‘나 좀 봐줘! 나도 젊은이들 노는 데 섞여서 잘 놀 수 있어. 나 대한민국 대통령이야!’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자리를 뜨는 대통령을 수차례 카메라로 잡아주는 방송사 역시 한심했고요.
프로야구 팬이자, 저 역시 야구를 즐기는 아마추어 야구인으로서, 박 대통령이 야구를 욕보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경기 결과 기사 못지않게 많이 쏟아져나온 ‘박근혜 시구’ 기사들을 보면서 다시 화가 났습니다. 대선을 치른 지 1년이 다 돼가고 있지만 아직도 국정원과 군 등의 선거 부정개입 증거들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계절이 바뀌도록 촛불을 들고 대통령의 대답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박 대통령이 너무도 해맑은 모습으로 야구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게 남의 잔칫집에 불쑥 나타나서 헤헤 웃고 손 몇 번 흔들어주면 국민들이 그저 좋다고 박수 칠 줄 알았던 걸까요? 국민들을 얼마나 무시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정말 기가 찹니다. 국민들이 원하는 대화의 장에는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던 대통령이, 초대하지도 않은 축제에 나타나 ‘이미지’를 구걸했습니다. 올해 한국시리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가장 기억하기 싫은 한국시리즈로 남을 것이 분명합니다.
* <리얼리스트100>(www.rea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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