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아(가명), 잘 지내니? 사실 학교 다닐 때 친하게 어울린 것은 아니라서,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 해도 이렇게 편지를 쓰기에는 좀 어색하구나. 지난해 말부터 지금까지 아홉 달쯤 되는 시간 동안 신문 맨 꼭대기에서 네가 일하는 ‘회사’의 이름을 참 자주도 보게 됐단다. 그래서 이렇게 어색함을 무릅쓰고 글을 쓰게 됐다. 네가 일하는 회사, ‘국정원’ 때문에 말이다.
다시 한번 안부를 묻고 싶구나. 잘, 지내니? 네가 잘 지낸다고 해도 참 씁쓸하고, 잘 못 지낸다고 해도 그것대로 좀 안타까운 시절이다. 3년도 더 전이었지? 다른 동기 결혼식에서,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한 10년 만에 너를 만났을 때 말이야. 네가 국정원에 들어갔다고 누가 자랑하듯 옆에서 말했을 때, 나는 너와 악수하던 내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당황했단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정원이란 곳은 좀 미운 곳이거든. 대학에서 만난 내 다른 친구들을 감시하고 미행하고 겁주면서 괴롭히는 곳이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설마 야당 대선후보를 깎아내리는 댓글을 다는 일까지 할 줄은 몰랐다. 거창하게 ‘심리전’이라는 이름까지 붙은 그 일이, 사실은 ‘좌빨 죽어라’, ‘절라디언 꺼져라’ 하는 수준의 ‘악플’을 다는 일이었다는 걸 알고 더 놀랐지.
그걸로 끝이었다면 다행이었을 텐데, 이른바 너희가 ‘NLL 포기 발언록’이라고 부르는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녹취록을 마음대로 공개해버린 걸 보고는 또 놀랐다. 그래도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 하던 시절의 자긍심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마저 내던졌다 싶더구나. 그리고 또 최근, ‘내란음모 사건’이랍시고 또 터뜨린 것을 보니 정말 한숨이 또 나더라. 정신 나간 언론들이 열심히 받아써주니 참 고마울 따름이겠지만, 그것 또한 한심한 ‘발악’으로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른바 ‘국정원 댓글녀’로 알려진 네 동료가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타났을 때, 네 생각이 제일 많이 나더라. 내 동기 대웅이는 국정원에서 대체 어떤 일을 한 걸까. 댓글을 달면서 ‘심리전’을 하고 있을까, 정상회담 회의록을 짜깁기해 ‘NLL 포기’ 발언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아니면 ‘이석기가 금강산 관광을 간 건 북한 잠입 목적이었다’는 보도자료를 쓰고 있을까.
정말 댓글을 쓰거나 회의록을 짜깁기 하거나 간첩 만들기 소설을 쓰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그 누구보다 신념에 차서 사명감을 느끼며 하고 있기를 바란다. 그냥 어렵게 취직한 공무원 자리를 지키고, 월급이나 잘 받고 줄 잘 서서 승진이나 좀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요원’의 일을 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거야. 차라리 그 편이 너도 더 행복할 것이고, 나도 너에 대한 쓸모없는 연민 따위 품을 일 없으니 서로 좋겠다 싶어.
‘빨갱이’를 잡는 게 어쩔 수 없는 네 일이라면, 신념과 사상으로 똘똘 뭉친 제대로 된 ‘요원’으로서 열심히 임무를 다해라. 네가 만약 월급 몇 푼이나 받자고 아무 생각 없이 민주주의를 망치고 진실을 흐리고 인권을 희롱하는 짓을 하는 족속이라면, 그땐 정말 너를 친구가 아니라 사람 취급도 하기 힘들 테니까.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아마 없겠지.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이석기 다다다음 순서쯤으로 내가 너희 ‘회사’에 불려간 날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잘 지내라는 말도, 못 지내라는 말도 하기가 어렵겠구나. 안녕.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네. 안녕.
* <리얼리스트100>(www.rea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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