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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에 맞서는 진보, 연대냐 '선 긋기'냐

긴 글/칼럼

by 최규화21 2013. 11. 12.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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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아침, 영하에 가까이 떨어진 기온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벌써 겨울이 오는가 싶더군요. 외투에 내피를 챙겨 입으면서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이 차가운 날씨, 벌써 일주일째 노숙농성을 해오고 있는 이들이 생각나서 그랬습니다. 지난 5일부터 서울시청 광장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는 통합진보당 당원들, 그리고 6일부터 국회 앞에서 삭발과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진보당 국회의원들 말입니다.


지난 5일 아침 정부는 정홍원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법무부가 긴급 안건으로 상정한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건’을 의결했습니다. 서유럽을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전자결재로 이를 재가했고, 속전속결로 낮 12시쯤 헌법재판소에 해산심판 청구안이 접수됐습니다.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을 대통령도 없는 틈에 도둑질하듯 서둘러 처리했습니다.


법무부의 근거는 단순했습니다. 진보당 강령 중 ‘진보적 민주주의’는 김일성의 사상을 도입한 것이며, ‘민중주권주의’는 헌법의 ‘국민주권주의’에 반한다는 이유랍니다. 그리고 진보당이 북한의 대남혁명론을 추종한다면서 이석기 의원과 이른바 ‘RO’를 근거로 들었습니다. ‘아전인수’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릅니다. RO 어쩌고 하는 것은 아직 법원도 판단하지 못한 것이니 당연히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검찰도 이석기 의원을 기소하면서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는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봅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여운형과 미국 정치사상가 허버트 크롤리도 사용한 개념인데, 그게 정말 ‘종북’의 증거가 된다고 생각한 걸까요? 또 ‘국민’이 아니라 ‘민중’이 주권을 가지면 안 된다는 소리는 언급할 가치도 못 느끼겠습니다. 전국에 10만 명의 ‘민중의 지팡이’가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나라에서, 이 무슨 유치한 말장난입니까?


‘위헌정당’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과정도 졸속, 그 근거도 부실.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결국 국민들에게 논리로 설득할 마음이 없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여러 분석들이 나옵니다. 내년 봄 지방선거 야권연대를 막기 위한 것이라 보기도 하고, 지난 대선 당시 이정희 진보당 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카키 마사오’라 비난한 것에 대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와 함께 이어지는 ‘비판세력 죽이기’ 과정이라는 시선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우익정권의 영원한 ‘생명연장’을 위해, 박근혜 정권은 5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할 것입니다. 그 시작으로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을 대표하는 전교조와 진보당부터 법의 바깥으로, 재야의 영역으로 치워버리려는 것이죠. 진보가 수면 아래로 잠기는, 제2의 유신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보당의 다음은 누가 될까요?


특히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사건 이후로, 어디서든 진보당에 도움이 좀 되는 이야기를 하려면 ‘나는 진보당과 이석기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하는 소리를 꼭 붙여야 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너도 진보당이냐?’, ‘너도 종북이구나!’ 하는 소리가 따라붙을 거라는 짐작을 당연히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쟤네랑 같은 무리로 보여선 안 돼’ 하는 생각이 이른바 민주진보 인사들 안에도 강하게 자리 잡은 거겠지요.


그런 생각이 하루하루 민주진보세력의 붕괴를 앞당길 것입니다. 이런 ‘무대포’식 탄압 앞에서도 연대보다 ‘선 긋기’를 앞세우는 진보세력이라, 정말 야금야금 허물어뜨리기 쉬운 성벽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고 생각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비판할 때와 연대할 때를 구분할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찬바람 부는 광장에서 새벽 이슬을 맞아본 이들은 알 겁니다. 옆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한 사람의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리고 그 사람이 쓰러지고 나면 나 역시 쓰러질 때가 가까워진다는 것도요.


법무부는 정당활동 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정당 보조금이 지급되는 15일 이전에 판결해달라고 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법무부의 손을 들어준다면 진보당은 위헌정당 해산심판 판결이 나기까지 사실상 아무 활동도 할 수 없습니다. 국회 앞, 그리고 서울시청 광장. 그 차가운 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의 절박함은 하루하루 달라질 것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정당해산’이라는 폭거. 그것을 막기 위해 글 한 줄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헌법재판소의 민주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을 요구합니다.


* <리얼리스트100>(www.rea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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