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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 한 마리로 남은 '머슴의 인생'

시/시 읽기 세상 읽기

by 최규화21 2012. 8. 2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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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비 한 마리로 남은 ‘머슴의 인생’

   [시 읽기 세상 읽기 4] 곽재구 <약천리 허상갑씨가 굴비 식사를 하고 난 뒤>



   약천리 허상갑씨가 굴비 식사를 하고 난 뒤

   곽재구


  약천리 허상갑씨는 

  육이오 때 인민군도 다녀오고

  국군에도 다녀온 

  특이한 이력이 있는데요


  마을에서 제일 부자인

  청송 심씨 종손 댁 큰머슴을 살다가

  주인 아들 대신 

  인민군에 다녀왔겠지요


  낙동강 전투에서 

  패잔병이 되어

  터벅터벅 걸어서 고향 마을까지

  혼자 돌아왔는데요


  이번에는 주인 아들의

  국군 영장이 나와서는

  영락없이 또 국군에 들어갔겠지요

  

  전쟁 다 끝나고

  허상갑씨 집으로 돌아왔을 때

  주인댁에서 한상 걸게 차려냈는데

  잘 구운 법성 굴비 한마리를 

  꼬리부터 뼈 하나 남김없이 다 먹은 뒤에

  소 몰고 곧장 들로 나갔지요


  자운영꽃 수북하게 핀

  논을 갈아엎으며

  이러이러 땅 보니까 힘 난다

  전쟁놀음 같은 건 한순간에 잊었지요


  - <와온 바다> 곽재구 시집, 창비, 2012년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속에 처한 단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서도 그들의 삶이 모여 만든 역사의 존재를 알아야 진정으로 인간과 역사의 관계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지주와 머슴이라는 신분의 구분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던 그 시절, 이 땅에 불어닥친 전쟁의 된서리도 ‘못나고 없는’ 이들에게만 더욱 혹독했다.


  지주의 아들 대신 인민군으로 한 번, 국군으로 한 번 전쟁터에 끌려간 허상갑씨.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그를 맞이한 “잘 구운 법성 굴비 한마리”와 “자운영꽃 수북하게 핀/ 논” 덕분에 그는 “전쟁놀음 같은 건 한순간에 잊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자운영꽃이 주는 낭만의 힘을 읽을 수도 있겠고, 인민군과 국군으로 편을 가른 이데올로기의 무용함과 함께 법성 굴비가 주는 ‘먹고사는 것’의 엄중함을 읽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읽은 것은 전쟁과 신분제라는 역사의 만행 속에서 삶을 유린당하고도, 걸게 차린 밥 한 상과 다시 땀 흘릴 땅의 존재에 위로받아야 하는 이름 없는 인생의 비참함이었다. “마을에서 제일 부자”라는 주인집 밥상에는 뻔질나게 올랐을 법성 굴비. 그 상을 한번 받기 위해 허상갑씨는 두 번이나 주인 아들을 대신해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전쟁터에 몸을 던져야 했다. 자신이 누구에게 총을 겨누고 무엇을 위해 수류탄을 던져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겠지. 한 상 비우고 곧장 들로 나가 “이러이러” 땅을 갈아엎은 그의 노동도 결국에는 단지 주인집 곳간을 채워주기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그때로부터 70년쯤 지난 지금에도 허상갑씨 같은 인생이 여전히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나라가 어렵다고, 회사가 어렵다고, 회사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늘 앞장서서 희생하기를 강요당한 노동자들. 투기꾼들의 손에 회사를 이리저리 팔아넘기다, 수지가 안 맞는다고 일터에서 내쫓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얼굴도 생각났다. 해를 몇 번씩 넘기며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그들의 요구는 결국 ‘다시 일하게 해달라’는 것 하나뿐이다. 허상갑씨가 다시 주인의 땅을 부치며 일하는 머슴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에 위로를 받았듯이, 주인집 밥상의 굴비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다시 기계를 돌리고 자동차를 만들며 일하는 것으로 그들은 만족한다.


  허상갑씨의 삶이 전쟁과 봉건사회라는 역사를 보여주는 것처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삶은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린 2012년 신자유주의 시대의 역사를 보여준다. 세월이 흘러 저 먼 훗날의 사람들은 그저 ‘2000년대 초반에는 신자유주의와 그에 따른 정리해고가 횡행했다’라고만 기억할지 모르는 역사.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제발 “정리해고 같은 건 한순간에 잊었지요”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허상갑씨는 주인의 논을 갈아엎었지만, 노동자들은 이 시절의 야만을 갈아엎고 새로운 세상의 씨앗를 심기를.

  


와온 바다

저자
곽재구 지음
출판사
창비 | 2012-04-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시인으로서 걸어간 새로운 길!곽재구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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