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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심'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

시/시 읽기 세상 읽기

by 최규화21 2012. 5. 6.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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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중심’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

   [시 읽기 세상 읽기 2] 이시영 <저녁에>



   저녁에

   이시영


  마른 나뭇잎 하나를 몸에서 내려놓고

  이 가을 은행나무는 우주의 중심을 새로 잡느라고

  아주 잠시 기우뚱거리다


  -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시영 시집, 창비, 2012년



  세상에 돈 한 푼 안 내고도 꼬박꼬박 먹을 수 있는 것은 나이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이 먹는 것을 정말 공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먹은 만큼 그 값을 하지 못하면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람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공자는 60의 나이를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이라는 말로 표현했나 보다.


  이시영 시인처럼 이순의 나이가 되면 사람의 소리 말고도 우주의 소리도 순하게 들을 수 있게 되는 걸까. 마른 나뭇잎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그 하찮은 소리에서 우주의 중심이 기우뚱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이제 겨우 서른 해 남짓 인생의 맛을 본 내게는 너무도 높은 경지다.


  모든 존재의 무게가 서로 균형을 이루고 서로가 서로를 넘어지지 않게 붙잡고 어울리는 것으로 우주는 유지된다. 그 점에서는 코끼리 한 마리의 무게와 개미 한 마리의 무게가 같다. 어느 하나를 해치고 망가뜨리면 우주의 중심은 그쪽으로 기울어져 기우뚱거리게 되고 만다. 어느 하나 가볍고 무거운 것 없이, 모두 귀하다. 모두 중심이다.


  은행나무는 제 잎사귀 하나가 떨어져 우주의 중심을 기울이는 것을 이리 걱정한다. 계절이 바뀌고 목숨을 다하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수많은 존재가 나고 돌아가는 모든 과정도 완전한 조화와 균형 속에서 우주의 중심을 흔들지 않으며 이루어져야 하는 것 역시 우주의 이치다.


  그 이치에서 비껴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우주의 이치보다 돈의 이치를 따르는 인간. 나뭇잎 하나를 떨어뜨리면서도 우주의 중심을 걱정하는 은행나무를, 인간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베어버린다. 길을 낸다. 아파트를 짓는다. 댐을 짓고, 운하인지 뭔지 모를 물길을 만들고, 군사기지도 만들고, 관광단지도 만든다. 그것이 우주의 중심을 얼마나 뒤흔들고 있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인간이 무너뜨린 우주의 중심을 새로 잡기 위해 한쪽에서 다른 생명들이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나뭇잎 하나부터 코끼리 한 마리까지 모든 존재가 우주의 중심이지만, 인간은 오직 인간만이 우주의 중심이라 여긴다.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은 사실 ‘순한 말만 귀로 듣는다’는 뜻이었나? 이순을 훌쩍 넘겨 ‘종심’의 나이에 이르렀다는 이 나라의 대통령은 우주의 소리는커녕 사람의 소리도 듣지 않는다. 공자는 나이 70을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종심이라 했지만, 대통령은 이 문장의 뒷 반절을 싹 지워버린 채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는 것만 배웠나 보다.


  해가 갈수록 나이 먹는 게 점점 빨라지는 것 같다. 내 나이에 맞는 값을 치르려면 과연 어떤 소리를 듣으며 살아야 할까. 봄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봐야겠다.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저자
이시영 지음
출판사
창비 | 2012-02-0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삶을 들여다보는 예리한 통찰력과, 현실과 밀착된 서정시를 만나다...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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