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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위의 거녀, 바다를 보다

시/시 읽기 세상 읽기

by 최규화21 2012. 4. 25.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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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위의 거녀, 바다를 보다

[시 읽기 세상 읽기 1] 문태준 <모래언덕>



모래언덕

문태준


이곳 바닷가에 모래언덕이 있다

기억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부터

거녀(巨女)가 살고 있다, 나와 당신이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같이 균등하게

모래에 매여 있다

모래들은 쓸려 한데 쌓인다

그리고 쌓임은 겨를도 없이 옮아간다

오늘 나는 나의 몸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아침에는 의욕의 얼굴을

정오에는 단단한 어깨, 석양에는 볼록한 아랫배를

곧 올 밤엔 나를 에우는 거센 바람

나는 대기 속 뭇별처럼 흩어질 것이다

시간은 뭉그러지고 늘어지는 나의 몸 위를 흘러가고

어려워라, 나의 몸조차 나의 것이 아니므로

나를 다시 구성해 나를 이해하는 일은

나는 먼눈으로 우는, 무용한 사람

바람에 밀리며 수북하게 쌓였다

흐물흐물 허물어지는 사람

모래이불을 덮고

휘우듬하게 쌓여서 곧 쏟아질 자세

나는 점점 비대해진다

모래에 연연해하므로

모래에 매여서


- <먼 곳> 문태준 시집, 창비, 2012년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느는 것은 뱃살뿐이다. 식사를 줄여보고 짬짬이 운동을 해봐도 좀처럼 빠질 생각을 않는다. 내 몸에는 넉넉함이 날로 늘어가지만 그만큼 행복이 늘어가는 것 같지는 않다. 마치 바닷가 모래밭을 걸어가는 것처럼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발 아래가 푹푹 패여 더 지치기만 할 뿐이다.


나와 당신이 모두 ‘거녀(巨女)’가 되어 살고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 우리가 하나같이 균등하게 매여 있는 이 모래밭은 어디일까. 우리는 아마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이 모래밭 위를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걸음마도 옆집 애보다 늦으면 안 된다, 말도 뒷집 애보다 늦으면 안 된다, 한글 떼는 것도 친척집 누구보다 늦으면 안 된다, 그렇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모래밭을 아등바등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거녀로 자라났다.


성적 경쟁이 끝나면 학벌 경쟁, 학벌 경쟁이 끝나면 스펙 경쟁, 그리고 연봉 경쟁, 승진 경쟁, 저 끝에는 ‘자식 잘 키우기 경쟁’으로 이어지는 일생의 모래밭. 볼록한 아랫배가 나오는 석양 무렵이 되면 이제 그만 이 모래밭에서 빠져나오고 싶어지겠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무거워진 몸 때문에 몇 걸음 더 떼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무수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며 나는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빛나는 이름이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나를 에우는 거센 바람이 부는 밤이 되면, 그저 내 몸은 바람에 밀리며 수북하게 쌓여가는 모래알 하나, 존재도 이름도 없는 ‘모래밭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먹고사는 것보다 존엄한 것은 세상에 없다. 그래서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말은 우리가 모래밭을 걸으며 점점 비대해지는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유효한 변명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내가 먹고만 살기 위해 그 수많은 경쟁들이 필요했나 돌아보라. 그 많은 사람들이 모래 속으로 낙오되고 희생된 것은 정말 나를 죽지만 않고 살아 있게 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내 배를 이토록 비대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는지.


이대로 모래에 매여 모래로 흩어지는 뭇별이 될 수는 없다. 모래밭은 바다와 닿아 있기 마련. 아무리 무거워진 몸이라도, 제 품 안의 것을 지키려 웅크리지만 않는다면 바다는 그 몸을 두둥실 띄워올려준다. 수많은 이름들이 뭉그러져 쌓인 모래언덕. 그곳에서 등을 돌리고 바다로 가는 한 마리 바닷게의 뒤를 쫓자. 그곳에서 우리도 바다 위를 나는 반짝이는 이름 하나 될 수 있지 않을까.



먼 곳

저자
문태준 지음
출판사
창비 | 2012-02-27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문태준 시인의 다섯 번...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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