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간다는 것은 곧 ‘살아간다’는 것
[시 읽기 세상 읽기 3] 배영자 <시장에서>
시장에서
배영자
빈 가방을 메고 버스를 탔다.
흔들거리는 버스 안에서 잠도 서서히 깬다.
얼마 가지 않아 내렸다.
새벽 시장이다.
입맛 없는 여름철 아이들이 생각나
열무 세 단 샀다.
그리고 뭘 살까?
뭘 살지 계획도 없지만
그냥 시장에 온다.
한 소쿠리 주이소.
막내딸이 좋아하는 참외다.
“곱고 점잖하이 참 예쁘지만
아지매도 많이 늙었네요.“
이십 년도 넘게 다닌 시장이다.
과일 장수 아저씨도 나물 파는 할머니도 나도
그 세월을 함께 보아 가며 늙었다.
인사도 안부도 묻지 않지만
시장에서 볼 수 있으면 다 무사한 거다.
세월 따라 늙어야지요, 많이 파이소.
- <찔레꽃> 경남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94명 시, 보리, 2012년
사람이라면 누구든, 언젠가는 죽는다. 우리가 살아온 날 뒤로 하루하루가 더해지는 것은 곧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더 늙어가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어간다는 것. 태어난 뒤로 줄곧 늙어갈 뿐인 인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는, 누구에게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어려운 숙제다.
배움의 때를 놓치고 나이 오십에 뒤늦게 여고생이 된 시인은 ‘늙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녀에게 ‘늙음’은 ‘세월을 따르는 것’이다. 이십 년 넘게 서로를 보아가며 세월을 따라온 “과일 장수 아저씨도 나물 파는 할머니도 나도”, 모두 서로가 무사히 늙어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만 족하다. 그것은 ‘아무래도 세월은 거스를 수 없다’는 체념과는 다른 뜻이다. 서른 살 새댁이 쉰 살의 어머니로 변하는 동안, 늙음은 새로움을 낳았다. 하루하루 늙어가며 그만큼의 새로움을 무사히 맞이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늙음’이다.
어떤 사람들은 늙음을 부정한다. 늙는 만큼 새로워지는 인생을 부정하고 과거에 매달린다. 주름이 보기 싫어 무슨 주사를 맞기도 하고, 얼굴과 몸에 칼을 대어서 늙어가는 자신을 억지로 멈추어둔다. 늙어버린 오늘을 바로 맞이하려 하지 않고 하루라도 덜 늙은 날을 그리워하면서, 언제나 “내가 소싯적에는 말이야” 또는 “내가 일주일만 젊었어도” 하는 말을 달고 산다. 모두가 ‘늙어서 새로워지는’ 자신을 부정하는 일들이다.
김해화 시인은 <새로움에 대하여>에서 “새로움이란/ 새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네/ 이렇게/ 거짓 없이 낡아가는 것이네”라고 노래했다. 이십 년 넘는 세월을 무사히 함께 늙어가는 새벽시장의 이웃들을 보는 배영자 시인의 마음도 그와 같다. 늙어간다는 것은 곧 살아간다는 것. 오늘도 이웃들과 함께 무사히 늙어가며 그만큼 새로워진 날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인생의 진리란 이토록 단순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찔레꽃
- 저자
- 경남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94명 지음
- 출판사
- 보리 | 2012-05-01 출간
- 카테고리
- 시/에세이
- 책소개
- 소박한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살아 있는 교육」 제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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