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고은
수유리 안병무네 집 마당에서
초례 마치고
한강가에서
하룻밤 자고
안성 대림동산으로 왔다
상화 남편은 얼간이
상화는 철부지
축의금 봉투를 꺼내보았다
이백만원 얼마
상화
상화 남편
둘이 지닌 것 털어
집을 샀으니
화곡동 집 팔리지 않고
억지로 집을 샀으니
이백만원 얼마 이것으로 살아야 했다
마음속 화수분이라
무어나 차고
무어나 넘쳤다
마음 밖 가난이라
전화도 없다
전화 걸려면
십분쯤 가서
고개 너머 관리사무소 전화를 빌려야 한다
민음사에서도
문익환도
전보로 급래급래를 알려왔다
이백만원 얼마는 곧 동났다
안성장에 가
빗자루 사고
삽도 호미도 샀다
개수대 그릇도 샀다
빈털터리인데
창비에서 원고료가 왔다
살았다
살았다
무턱대고 자전거 한 틀을 샀다
자전거에
상화를 태우고
상화 남편은 견마를 잡혔다
삼단 자전거 바큇살이 찬란했다
오르막 허위허위 올랐다
내리막 어질어질 내려갔다
다음날부터 상화가 학교버스 내리면
입구에 나가 있다가
얼른 자전거에 태운다
집이 가까워오는 동안
상화는 맨드라미인 듯
옥잠화인 듯
과꽃인 듯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동료 교수 하나가 결강한 이야기
강의실 학생들의 눈빛 이야기
율리씨즈 이야기
부총장 면담 이야기를 한다
상화 남편은
장미골 모서리를 돌 때
오늘 쓴 시 이야기를 한다
상화는 누이인 듯 누나인 듯
상화 남편의 서투른 이야기를 듣는다
자전거 바큇살에 끼인 풀이 떨어져나갔다
해가 구름 속에서 나온다
이 사랑이 나중까지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이 아닌 것
상화는 안다
상화 남편은 안다
집에 오니 무슨 전보가 또 와 있다
- <상화시편> 고은 시집, 창비 펴냄,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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