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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던 차장님, 여기서 만날 줄이야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2. 7. 1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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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던 차장님, 여기서 만날 줄이야



  2008년 여름, 대학 졸업반이던 스물일곱의 내가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곳은 재벌그룹 계열 출판사의 백과사전 팀이었다. 이삼십 대라면 누구나 초등학교 시절 한번쯤 펼쳐봤을 법한 ‘ㄷㅇ전과’로 유명한 그곳. 수능성적과 별 차이 없던 토익점수와 선동열 방어율에 버금가는 학점을 자랑하던 내가 그런 데를 정규직으로 들어갔을 리는 없고, 당연히(?) 사실상 시급제 아르바이트나 다름없는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계약직이라도 좋다, 대기업 출입증 한번 목에 걸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간 것은 아니다(실제로 대기업 출입증을 주지도 않았다. 내가 걸고 다닌 것은 방문자용 임시출입증. 흥). 그냥 출판편집자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뭘 해야 될지 몰라서 일단 경험이나 쌓자고 들어간 거였다(‘출판인학교’ 같은 게 있는 줄은 편집자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리고 대학 시절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공부는 안 해본 나를 그 회사는 왜 뽑았는가 하니, 공부 빼고 다 해봐서 ‘백과적’ 지식이 많은 것 같으니 백과사전 편집에는 딱이라고 생각했단다.


  나한테 그 얘기를 해준 차장님은 근로계약서를 쓸 때 ‘계약기간은 2년이지만 열심히 하면 연장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정규직도 될 수 있다’고 했다. 여섯 달 전까지만 해도 진보정당의 대학생위원회 위원장으로 ‘비정규직 철폐, 노학연대 투쟁’의 선봉(?)에 서 있던 내게 그런 사탕발림이야 씨알도 안 먹혔다. 어차피 길어야 1년 10개월쯤 되면 자를 거라고 생각했고, 솔직히 관심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백과사전 만드는 일 따위(?)야 평생 하라고 해도 내가 싫었다. 그냥 길어야 1년 정도 출판사 맛만 보겠다고 생각했다.


  내 일은 인터넷으로 서비스될 백과사전 원고를 교정교열 하는 것이었다. 백과사전 팀은 모두 열 명 남짓 됐는데, 교정교열을 보는 세 명은 모두 계약직이었다. 난 아침부터 저녁까지 ‘헐리웃’을 ‘할리우드’로 고치고, ‘후덥지근’을 ‘후텁지근’으로 고치고, ‘두리뭉술’을 ‘두루뭉술’로 고치는 일을 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면 눈앞에 ‘ㄱ, ㄴ, ㄷ, ㄹ, ㅏ, ㅑ, ㅓ, ㅕ’ 한글 자모가 둥둥 떠다녔다.


  그렇게 두 달쯤 지났을 때, 지겨움이 목까지 차올랐다. 분명 그 백과사전을 만드는 데 내 노동은 들어가지만, 내가 하는 일은 백과사전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단순히 ‘가나다라’ 하는 ‘말조각’들을 만지는 일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다. 10년에 한 번 낼까 말까 한 백과사전이다 보니, 내가 만든 책을 대체 언제쯤 손에 쥐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 전에 계약해지, 또는 재계약 거부를 당할 게 명백했다.


  그러던 중 ‘그날’이 왔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올라와 커피를 한잔 마실까 하고 있는데, 차장님이 담배나 한 대 피우자고 나를 건물 뒤편의 정원(?) 같은 곳으로 데리고 갔다. 흠. 이미 느낌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차장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일부터 안 나와도 돼”였다. 아직 계약기간이 한참 남았는데 해고통보라니! 한 달 전에 문서로 통보해야 한다는 근로기준법도 어기고 하루 전에, 그것도 구두로 통보하다니!


  내일부터 머리띠를 두르고 출근투쟁을 해야 하나 생각한 것은 잠시였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랄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교정교열만 몇 년 한다고 책을 기획하고 편집할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이참에 회사를 옮겨야겠다 싶었다. 그래도 기분이 ‘엿 같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산이 줄었다고, ‘이런 말 하는 나도 괴로워’ 하는 표정으로 담배를 뻑뻑 빨며 말하던 차장님의 얼굴에 쌍욕을 퍼부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덩치 큰 차장님과 싸우면 한 대 때리고 열 대 맞을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임시출입증’으로 시작한 내 첫 직장생활은 그렇게 ‘여느 비정규직처럼’ 엿같이 끝났다. 하지만 실력은 없는 놈이 운은 억세게 좋아서, 나는 곧바로 다른 출판사에 취직을 했다. 적성과 경력(?)을 살려서 노동자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비록 대기업 출입증은 아니지만 내 이름이 박힌 기자증을 목에 걸고.


  뜻밖에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가을이었다. 노동자 잡지를 만드는 곳에서 2년 반을 일하고 지난해 초 <오마이뉴스> 편집부로 자리로 옮긴 지 반년쯤 지났을 때였다. 편집기자 공채가 또 있었는데, 백 명쯤 되는 지원자들의 원서를 출력하는 것은 ‘막내기자’인 내 몫이었다. 하룻저녁 퇴근을 포기하고 프린터 열기에 진땀을 흘리다가, 한 사람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차장님! 이름을 보니 차장님이었다. 사진을 보니 내게 백과적 지식이 어쩌고저쩌고했던 그 차장님이었다. 이력을 보니 내게 예산이 줄어서 미안하다고 했던 바로 그 차장님이었다. 아,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질인가. 40대 중반의 가장인 차장님이 박봉의 인터넷신문 편집기자가 되겠다는 열정으로 대기업 차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리는 없고, 이력서의 퇴사 날짜를 보니 이미 1년 가까이 ‘놀고’ 있는 모양이었다.


  3년 전 나한테 해고통보를 한 사람이, 지금 내가 있는 회사에 들어오겠다고 경력직도 아닌 신입 공채에 원서를 넣었다니.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짧은 탄식이 먼저 터져나왔다. 결국 차장님도 그때의 나 같은 ‘엿 같은’ 날을 겪었겠구나 싶었다. 아니면 남들은 팀장 되고 부장 될 때 밀리고 밀리다 자의 반 타의 반 사표를 써야 했거나. 말로만 듣던 대기업의 ‘승진 아니면 명퇴’ 법칙(?)이 차장님을 내몰지 않았을까.


  스물일곱 살짜리 계약직 사회초년생이나 40대 중반 대기업 정규직이나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사람’이란 점에서는 똑같았다.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도 될 수 있다’며 내게 희망을 말하던 차장님. 그렇다면 한때 차장님도 ‘열심히 일하면 연봉도 올리고 임원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을까? 아니면 나한테나 차장님한테나 절대 그런 날은 안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잠깐의 ‘사이비 희망’을 선물한 걸까.


  차장님이 공채에 합격했다면 이번에는 내가 선배기자가 되고 차장님이 후배기자가 되는, 그야말로 극적인 드라마의 2부를 찍었을 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하극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차장님의 입사원서를 보며 3년 만에 ‘입장의 동일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연대’의 시작 아닌가. 우리 두 사람에게 3년의 시간차를 두고 ‘엿 같은’ 날을 선물해준 고마운 재벌 출판사 사장님. 그분께 감사의 ‘더블 빅엿’을 선물해드릴 날이 하루빨리 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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