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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오늘보다 더 '느리게'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2. 6. 20.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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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은 오늘보다 더 ‘느리게’



  나는 선천적으로 성격이 악착같지를 못해서, 무언가 하나를 미치게 좋아하지도 않고 죽도록 싫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볼 때마다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거품이 잘 나지 않는 비누’와 ‘밥값보다 더 비싼 커피’.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내게 서두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나는 서두르는 게 정말 싫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됐을까 곰곰 생각하니, 아무래도 대학에 복학한 뒤 ‘복학생 운동권’으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내가 복학한 것은 2006년. 군대도 다녀왔고 철도 들었으니 이제 조용히(?) 살아야겠다 생각도 했지만, 3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기들과 후배들을 보니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짬짬이 뭐라도 해야겠다고 이것저것 거들다가 연말에는 덜커덕 총학생회 선거에도 나가고(결과는 참패), 그 다음 해에는 아무개 정당 학생조직의 ‘위원장’도 맡아버렸다.


  학교는 3년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 전에도 ‘아직도 대학에 운동권이 있냐’는 소리를 들어왔는데, 3년이 지난 뒤에는 정말 ‘씨가 말라’ 있었다. 활동할 사람은 없는데 그 전에 해오던 활동들은 빠짐없이 다 해야 했고, 학생회 활동에 정당 활동, 이런저런 동아리 부문활동까지 하면서 집회는 집회대로 다 나가야 했다. 10분 단위로 일정을 잡고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녀도 언제나 ‘할 일’은 더 많아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너무 숨찼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밟고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지 차근차근 내 발바닥 밑을 봐가며 일하고 싶었다. ‘이런 때일수록 결의를 높이고 동지들의 힘으로 정세를 돌파하자’고들 했지만, 너무 많은 일에 등 떠밀려 하루하루 지내면서 ‘나’를 놓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누가 월급을 주는 일도 아니고 툭하면 ‘빨갱이’ 소리나 듣는 일을 하면서, 내 ‘존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너무 치명적이었다.


  오늘은 또 얼마나 왔는지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삶. 어디로 가는지 돌아볼 틈은 없었다. 정신없이 달리며 흘려보내고 만 작은 ‘의미’들에 마음을 머무르게 할 여유도 없었다. 물론 내 나약함이 첫 번째 이유였겠지만, ‘나’를 잃어버린 채로 ‘가치 있게 사는 것’에만 의미를 두며 버틸 수는 없는 나날이었다. 결국 ‘나의 하루’가 ‘나’를 말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서, 2007년 말 대통령 선거를 끝으로 나는 학교를 떠났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운 좋게도 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사회’의 속도는 훨씬 더 빨랐다. 어디로 달리는지도 모르게 미친듯이 달리고만 있었고,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생각해보자’는 목소리는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는 세상이었다. 가족을 위해 잔업에 특근도 마다하지 않고 일하지만 정작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은 없고, 노후의 안녕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지만 그러는 사이 건강을 잃고 병든 몸만 남는 삶.


  모두가 ‘제일 돈 많은 사람’을 숨차게 쫓아가며 살 뿐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려야 하고, 돈 많은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뺏으러 오는 사람들을 피해 또 달려야 한다. 넉넉하고 여유 있게 살기 위해서 돈을 벌지만, 돈을 버느라 여유도 행복도 뒤로 미뤄야 하는 지독한 모순. 하루하루 정신을 놓고 아등바등 달려보지만, 우리가 달리는 길이 그 모순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세상은 숨기고 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제일 빨리 가는 사람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 달려서 그 사람을 따라잡아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라 겁을 주지만, 나는 그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걷고 싶다. 그래야 작은 것이 보인다. 그래야 저 뒤에 앉아서 세상의 속도를 원망하고 있는 지친 이웃들이 보인다. 가장 빠른 사람의 속도가 아니라 가장 느린 사람의 속도에 발맞추는 세상을 꿈꾸며, 나는 하루하루 더 느리게 살고 싶다.


  ‘행동’을 강요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존재’만으로 충분히 존엄한 사람들이다. 행동이 아니라 존재. ‘무엇을 얼마나 빨리 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를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하는’ 시간이 아니라 무언가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즐긴다. 늘 무언가를 하고 있는 바쁜 사람들보다, 그저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뿐인 별 볼일 없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긴다.


  나는 오늘도, 세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만 대서특필 되는 신문 정치면 대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그들의 못난 삶을 진솔하게 써낸 ‘사는이야기’를 읽는다. 속도와 경쟁의 가치를 ‘재미’로 위장한 텔레비전을 보는 대신 책장 한 장 한 장에 오래 머물러 뜻을 새겨야 하는 시집을 읽고, 기름을 태우고 시간을 몰아세우는 자동차를 타는 대신 흔하고 흔한 사람들의 얼굴과 소소한 이야기를 만나며 동네 골목을 걷는다.


  그렇게 살아서 언제 돈 벌고 언제 장가가고 언제 성공하느냐고? 행복은 성공만큼 빠르지 않다. 느리게 걷는 시간은 행복을 기다리고 ‘나’를 기다리는 시간. 누가 뭐래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느리게 살 테다.


  * 덧붙임말 : 지금도 대학에는, 내가 견뎌내지 못한 그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세상을 조금씩 움직여나가는 훌륭한 후배 활동가들이 있다. 그들이 부디 그 바쁜 일상에 떠밀려 ‘나’를 잃고 주저앉지 않기를, 매일매일 작은 승리를 맛보며 희망 속에 내일을 그리기를, 무한한 존경을 담아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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