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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의 젊은 날, 나는 '주사파'였다

긴 글/생활글

by 최규화21 2012. 6. 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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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년 전의 젊은 날, 나는 ‘주사파’였다



  때 아닌 ‘주사파’ 논쟁에 정치권이 시끌시끌하다. 여당은 한 야당의 국회의원들을 주사파라고 막 몰아세우더니, 이제는 탈북 대학생과 막말 언쟁을 벌인 다른 야당의 한 국회의원을 또 주사파라고 물러나라 난리다.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왜냐면 내가 바로, 명명백백한 ‘주사파’였기 때문이다.


  국가의 가치관이나 뭐 그런 거창한 걸 생각하면 또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둘레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내 ‘주사(酒邪)’가 그들의 ‘주사(主思)’보다 확실히 더 불온하고 치명적이었다. 1999년 세기 말의 공포와 혼돈이 전 세계를 지배했던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의 나는 주사의 길에 첫 발을 내딛었다. 


  봄인지 가을인지, 반팔을 입어도 좋고 긴팔을 입어도 좋을 그런 계절. 우리는 강원도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꽤 모범생이던 나는 반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녀석들과 한 조가 됐다.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 없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아무리 모범생이라도 그런 날까지 착하게(?) 보내는 것은 청춘에 대한 반역이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은 당연히 술. 모두 비장한 각오로 그날을 준비했다.


  거사 당일 아침. 우리는 결연한 표정(사실은 선생님한테 걸릴까봐 바짝 쫄아 있는 표정)으로 서로의 가방 속을 확인했다. 몇몇이 캔맥주 두어 개 정도씩을 가져왔고 소주를 가져온 녀석도 하나 있었나 없었나 가물가물하다. 나는 불투명한 플라스틱 우유통에 소주를 담아 갔다. 댓병 하나가 거의 다 들어간 것 같다.


  숙소에 도착하자 ‘말로 할 때 가방 속의 술과 담배를 자진납세 하라’는 선생님들의 협박이 있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범생 조니까 ‘설마 우리를 의심하고 가방까지 뒤지랴’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역시나 무사통과. 오후와 저녁 일정이 있었지만 우리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오직 깊은 밤을 기다릴 뿐이었다.


  시시껄렁한 레크리에이션이니 뭐니 하는 것들로 하루가 끝나고 드디어 때가 왔다. 선생님의 형식적인 점호가 끝나자 우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다. 방 한가운데 꺼내놓고 보니 꽤 수북했다. 하지만 결전의 순간이 오면 변절자가 나오기 마련! 피곤하다는 둥, 술이 뜨끈해서 맛이 없다는 둥, 한두 놈씩 방구석으로 내빼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 녀석은 ‘수학을 공부하는 게 수학여행’이라며 수학 문제집까지 꺼내는 것이 아닌가(공부가 너무 좋아서 커서 공부 그 자체가 되고 싶다고, 장래희망란에 ‘공부’라고 적던 놈이다). 옛날에도 꼭 배운 놈들이 친일파가 되고 했다더니, 역시 맞는 말이다.


  변절자에게 뜨거운 욕설과 차가운 냉소를 퍼주어주고, 세 명의 결사대만이 둘러앉았다. 원래 술을 마실 줄도 몰랐던 데다, 변절자들에 대한 분노까지 더해져 우리의 잔은 더욱 빨리 돌았다. 문예부 활동을 하면서 선배들이 주는 소주를 서너 잔 받아 마셔본 적은 있는데,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마신 건 처음이었다. 뭘 얼마나 마시는지도 모르게 술이 술술 들어갔다. 내가 가져온 소주를 거의 다 마셔갈 때쯤이었나, 한 동지가 먼저 잠이 들고……, 내 기억은 여기까지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당시 상황에 대한 서술은 복수의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방 한가운데 ‘큰 대’자로 드러누운 나는 마구 욕설을 시작했다.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게 주어를 생략한 채로. 한참 동안 큰 소리로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모든 ‘강아지’와 ‘성교를 할 놈’과 ‘남성의 성기 같은 녀석’들을 찾아대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하지만 금세 허리를 세우고 벌떡 일으켜 앉더니 그대로 폴더 핸드폰처럼 허리를 숙여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입 밖으로 다시 소환해낸 것이다.


  역시나 나처럼 술이 떡이 되어서 곤히 잠든 한 녀석의 발 위에 내가 내뿜은 뜨거운 것들이 ‘나빌레라’ 내려앉았다(발이 아니라 머리라는 주장을 하는 목격자도 있었으나 국가 보건과 국민 정서를 고려하여 무시했다). 뜨끈한 액체와 반고체. 그리고 그것과 함께 터져나온 힘찬 괴성에 잠이 깬 친구들이 나를 황급히 화장실로 데려갔고, 나는 그곳에서 위장을 깨끗이 비워낸 뒤에 착해진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는데, 물이 담긴 욕조에 이불이 잠겨 있었다. 거울을 보니 내 옷에는 노랗고 빨간 무늬가 점점이 생겨나 있었고……. 누가 전기톱으로 머리를 썰고 있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방으로 돌아오니, 친구들은 온갖 욕설과 베개 린치로 내 잠을 깨워주었다. 하지만 나는 뿌리 없는 식물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침은 당연히 못 먹었고, 어찌어찌 윗도리만 갈아입고 흔들바위로 비선대로, 친구들의 어깨에 걸쳐진 채로 끌려다니며 하루의 일정을 소화했다.


  나중에 보니 사진 속의 나는 참 착하게 웃고 있었다. 시들어버린 남국의 화초처럼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영혼을 하얗게 태워버린 빈 육체만 남아, 그래도 좋다고 웃고는 있었다. 이상하게도 담임 선생님은 그런 내 꼴을 보고도, 욕조 속의 이불을 보고도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어쩌면 엄청 두드려 맞았는데 그것마저 내 기억에서 지워버렸는지도. 어쨌든 사흘간의 수학여행은 내게 단 하루의 기억으로 끝나버렸다.


  그렇게 나는 주사파가 되었다. 그것도 아주 모질고 수준 낮은 주사파. 그 뒤로 바로 정신을 차려서 비(非)주사파가 됐다는 얘기로 글을 마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주사파였다. 욕설을 하거나 남의 발에 구토를 하는 방식은 더 이상 아니었지만, 혼자서 뮤지컬을 하거나 갑자기 쥐도 새도 모르게 집으로 사라지는 등의 문화적이거나 신비로운(?) 방식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말. 체질을 한번 바꿔보겠다고 사상전향서를 쓰고 술을 끊은 지 두 달이 넘었으니, 이제 나는 확실히 주사파가 아니다. 하지만 한 번 주사파는 영원한 주사파인 건지, 주사파를 죽이자 살리자 하는 기사를 보면 가슴이 뜨끔뜨끔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술에 취해 여기자를 성추행하고도 ‘술집 주인인 줄 알았다’던 강원도의 최아무개, ‘화끈한 대구의 밤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섰던 대구의 주아무개 같은 ‘진짜 주사파’ 전직 국회의원들이 생각난다. 여전히 ‘전 의원님’ 소리를 들으며 방귀깨나 뀌고 살 그들도, 요즘 나처럼 가슴이 뜨끔뜨끔 할까? 이미 그분들도 과감히 사상전향서를 쓰고 주사파에서 벗어나셨기를, 주(酒)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나이다,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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