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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한 글자 온몸으로 밀어낸, '엄마의 역사'

긴 글/리뷰

by 최규화21 2012. 7. 1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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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글자 한 글자 온몸으로 밀어낸, ‘엄마의 역사’

   [서평] ‘어머니 여고생’ 94명의 시 모음집, <찔레꽃>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엄마는 기분이 좋을 때면 늘 <찔레꽃>을 불렀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부르고 걸레질을 하다가도 부르고, 엄마의 애창곡은 <찔레꽃>뿐이었다. 나는 한 번도 찔레꽃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찔레꽃’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제일 먼저 엄마 생각이 났다.

  

  ‘찔레꽃’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서도 나는 제일 먼저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책 속에 수줍은 활자로 박힌 “가난한 삶에서 피어난 어머니들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수많은 엄마들을 만났다. 이 책은 뒤늦게 배움의 길에 들어선 경남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들의 시 모음집이다. 적게는 마흔 살에서 많게는 일흔 살까지, 94명의 ‘어머니 여고생’들이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수업시간에 쓴 시들을 추려 담았다.


  늦깎이 여고생이 된 엄마는 가족들에게도 말 못하고 “남편 몰래 등록한 지가 벌써 몇 주짼가/ 농협산악회 가입했다고 뻥깠는데/ (줄임)/ 졸업했다고 속여왔는데/ 어떤 반응이 나올까”(<학교 가는 날 아침>) 하고 걱정을 한다. 이름도 없이 누구의 ‘엄마’로만 살아온 사람들. “어느 순간부터 희수 엄마가 내 이름이 되어 있었다/ (줄임)/ 경남여고에서 한 달에 두 번/ 내 이름 선심 씨가 되는 날”(<엄마>)을 통해 엄마가 되기 전의 ‘나’를 찾고 있었다.


  가난 때문에 배움을 포기해야 했던 그 시절, “공납금이 밀려서/ 자퇴서를 쓰고 집에서 쉬었다/ (줄임)/ 다슬기를 잡고 있으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애들이 지나간다/ 창피해서 어디라도 숨고 싶었다”(<가난한 시절 이야기>)던 엄마들. 남들은 “후리아 치마에 하얀 칼라”(<교복>)를 입을 때, ‘공순이’가 된 엄마들은 “C반 한 학생이 졸다가/ 검지손가락이 기계 속으로 딸려 들어갔다는/ (줄임)/ 졸면 커피를 가루째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줄임)/ 지금까지 커피 냄새를 맡기만 해도 어지럽다/ (줄임)/ 약속 잡을 때 흔히 쓰는/ ‘커피 한잔 마시자’ 하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커피를 못 마시는 까닭>)고 노동에 저문 젊은 날을 돌이켜본다.  


  하지만 그 모진 날들을 다 견디고, 세월에 순하게 발 맞추는 법을 배웠다. “아지매도 많이 늙었네요// 이십 년도 넘게 다닌 시장이다/ 과일 장수 아저씨도 나물 파는 할머니도 나도/ (줄임)/ 시장에서 볼 수 있으면 다 무사한 거다// 세월 따라 늙어야지요, 많이 파이소”(<시장에서>) 하고 말하는 덤덤한 억양에서, 늙어감 또한 너무나 소중한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중년이 되도록 시라는 것을 배운 적도 써본 적도 없는 이들이, 이처럼 자신의 삶을 모조리 쏟아내서 한 편의 시에 차곡차곡 담아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고 감동도 재미도 없는 ‘쭉정이’ 시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울림이 있다. 손이나 머리로 쓴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밀어낸 눈물겨운 시. 이 책은 한 글자 한 글자에 그들의 서러운 삶과 애달픈 마음을 꼭꼭 눌러 담은, ‘엄마의 역사’인 셈이다. 


  기억은 기록을 통해 확장된다. 엄마들의 절절한 삶의 기억이 남긴 치열한 기록을 읽고 나니, 엄마의 기억들이 내 마음으로 뻐근하게 옮겨온다. 지금 나는 우리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가 부르던 ‘찔레꽃’ 노래 속에는, 엄마의 삶 어느 장면이 들어 있는 걸까. 이 책을 마중물 삼아 진정한 ‘엄마의 노래’를 끌어내보고 싶다. 여름휴가 때는 엄마와 나란히 엎드려 이 책의 책장을, 엄마의 기억을 한 장 한 장 넘겨봐야겠다.



- <찔레꽃> 경남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 94명 씀, 구자행 엮음, 보리 펴냄, 2012년 5월, 1만 원

  



찔레꽃

저자
경남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94명 지음
출판사
보리 | 2012-05-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박한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살아 있는 교육」 제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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